청량리역에서 진부역까지는 약 1시간반. 몇주 전 간신히 입석 표만 구해서 서서 갈 뻔했다. 그러나 코레일 기차표는 대개 직전에 취소표가 나온다. 청량리역 들어가면서 티켓 획득! 오늘 운수가 좋구나!
당일치기 대관령 여행은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숲길에서 시작했다. 십수년 대관령 왔다갔다 급기야 2년여 터잡고 살았던 현지인 안은금주님의 가벼운 산책 코스.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건너편에 작은 오솔길에서 출발했다. 한강 상수원 계곡 따라 잘 정비된 길이다.
가다보면 본격 월정사 전나무 숲길. 알고보면 무슨 100대 길 꼽힌 명소다. 다람쥐라기보다 사람 안무서워 하는 강아지 같은 개람쥐가 노니는 길. 아이들이 커다란 그네 타고 노는 길. 600년 전나무가 쓰러진 자리에 돌탑 쌓고 소망을 남기는 길.
월정사에 도착하면 차가운 오미자차로 한숨 돌린다. 에어컨 바람 대신 테라스 나무 그늘 아래 바람이 좋다. 전날 먼저 도착한 일행 말로는 밤에 18도 날씨 라는 대관령. 낮에도 그늘은 별로 덥지 않다. 이것이 피서.
점심은 안은금주님이 김치와 장을 구한다는 조성우 농부님 댁에서 집밥을 얻어먹었다. 가지와 문어에 콩나물 제육이 메인이었겠지만 유기농으로 직접 키워 밥상에 올린 모든 아이들이 달았다.
“된장은 하얀 곰팡이 걷으면서 발효시키면 나쁜 균이 완전히 사라지는데 5년 걸려요. 그때부터 먹으면 되요.”
“김치는 다시마 무 당근 양배추 사과 배 단삼 도라지 표고버섯 등으로 채수를 내고요. 생 죽방멸치를 죽염에 재우면 잡내 없이 감칠맛만 남아요. 그 젓갈에 양파를 버무려 발효시켜서..“
된장찌개와 김치만으로 흥분했는데 양배추도 단호박도 맛이 깊다. 감자조차 당도가 다른데 ”약을 치는 감자와 유기농 감자는 다르다”고.
.겨울 동치미를 봄에 된장에 박아두었다가, 쫑쫑 썰어 들기름에 살짝 무친 무 짱아찌는 누룽지와 조화가 일품이다. 배부른데 안 먹을 수가 없네. 일본 나나스케보다 훨씬 맛있다. 저거 안 파시려나..
집밥 호사 뒤 쥔장 내외가 만드신 딸기 발사믹 식초, 간장, 맛간장을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된장은 무거워서 포기. 무농약 구증구포 구기자차도 샀다. 구기자를 유기농 사과식초, 사과 꼬냑, 토종꿀에 재워가며 4개월간 숙성하면서 아홉번 찌고 말린 아이다. 이쯤되면 보약이지. 예정에 없던 쇼핑에 이리 뿌듯할 일인가.
** 신선팜 010-8748-9966
다음 목적지는 대관령 삼양목장. 일단 나무 그늘 아래서 아이스크림과 유기농 우유 건배. 먹어보지 않았으면 말을 마시라. 맛이 다르다ㅠ
100여마리 양떼는 아이들 체험 이벤트의 주인공이지만 310마리 젖소가 목장의 첫번째 소비자라고 김세하 삼양목장 대표는 말한다. 비료가 빗물에 쓸려가던 땅을 완전히 개간해 토양을 먼저 살리고 목초의 질을 바꾼 것은 소들을 위한 작업. 두번째 소비자인 우리는 좋은거 먹고 깨끗하게 자란 소들의 우유와 유제품을 먹는다.
보통 젖소들은 새끼를 두번 낳으면(이산) 수율이 꺾여서 현역에서 은퇴시켜 도축하거나 육우로 쓴단다. 4년여 하루 30~40리터씩(!) 젖을 내주고 생을 마감하는 셈이다. 삼양목장 소들은 오산, 육산, 대여섯 마리 새끼를 낳고 열살 넘은 아이들도 있단다. 대신 수율이 하루 26리터 정도로 떨어진다. 유기농 목초를 먹는 젖소는 젖을 많이 짜지 못하는데다 오래 살기 때문이다. 이러고도 비즈니스가 될까? 프리미엄 축산제품의 활로는 어디서 찾아야 하지? 내년에는 수입 유제품 관세도 없어진다는데?
김세하 대표님 얘기에 빠져들었지만 삼양라운드힐의 비경은 해발 1100m 정상에서 만끽했다. 멀리 강릉시 너머 동해가 푸르고, 풍력 발전기 사이로 가장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능선이 설악산 대청봉이다. 하늘과 맞닿아 펼쳐지는 능선, 수평선을 둘러보면 가슴이 웅장해진다. 삼양목장 김세하 대표님은 이곳을 방문한 아이들이 호연지기를 키웠으면 한다고. 호.연.지.기. 잊고 있던걸 깨워주셨다.
대관령 정상엔 그늘이 없지만 양산 쓰니 그럭저럭. 해발 800m 입구에서 차로 올라갔다. 걸어 내려오는 것도 괜찮겠지만 여름엔 사양ㅋ
다음 코스는 비탈을 경작해 삶를 꾸렸던 이들의 마을 안반데기 배추밭.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평원을 닮았다. 사진 찍고 내려와 카페에서 배추밭 뷰 잠시 감상하고
대관령을 안마당으로 누벼온 안은금주님의 비밀 공간에서 계곡물에 발 담그기를 시연하려다 미끄러져서 계곡에 빠진 나ㅋㅋㅋ 바지 다 젖었는데 여름이라 끝내 말랐고 안 다쳤으니 일행에게 큰 웃음 준걸로 됐다.
진부역 부근 유명막국수. 수육 소짜(2만) 넉넉한데다 살살 녹는 맛. 물막국수(8000)는 배불러도 다 들어가는 맛이라 하자.
저녁 기차로 돌아오는데 이거이거 하루 일정 맞아? 너무 알차고 훌륭해서 놀랍다. 언제든 더위 피해 훌쩍 다녀올 결심! 멋진 하루를 기획하고 이끌어준 친구에게 그저 고맙다. 그녀는 직접 경험한 로컬의 음식과 문화를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얹어 전해준다. 그냥 대관령 참 좋네~ 끝~ 이 아니라, 그 고장의 사람을 발견하고 연결해준다. 유기농을 고집하며 된장도 최소 5년, 구기자는 아홉번씩 찌고 말리는 분, 좋은 우유를 위해, 젖소를 위해 뭐든 해내는 분 이야기를 듣다보면 삶에 정성을 다하는게 뭔지 생각하게 된다. 나는 숟가락 얹어 기록만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