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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호 Mar 21. 2024

요가가 가져다주는 고찰들

Day 25

아쉬탕가. 초급 시간이 아닌 정석대로 진행하는 아쉬탕가 시간이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정말이지 아침부터 ‘아- 가기 싫다.’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앉아 화장실에 가 아침 볼일을 보다 문득 지난 일들이 떠올랐다.

구질구질하고 오래된 해답 없는 관계에 관한 이야기들…(왜 이런 것들은 꼭 욕실에 들어가면 하나둘씩 불쑥불쑥 올라오는지 의문이다. 이쯤이면 욕실은 그 안의 물방울들 따라 지난 시간들이 머물러 둥둥 떠다니는 공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예전 같으면 오래 생각하고 궁리하고 어떤 게 최선일까, 나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나 따위를 분석하고 생각했겠지만 이젠 그런 에너지나 시간 따윈 없다. 왜냐면 나는 요가를 가야 하기 때문.


‘가자. 가는 게 좋다.’


백번 생각해도 답도 없는 고민 생각해 봤자 궁둥이 떼고 움직여 지금 내 몸에 충실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생각으로 얻은 게 아니라 직접 경험하여 얻은 나름의 이치다.

물론 그런 궁리와 성찰, 자신을 바로 보는 그런 시간들이 헛된 건 아니다. 그 안에서 얻고 깨달은 것들이 무수히 많다. 다만, 타인의 마음이나 행동에 관해 내 멋대로 의미를 부여하거나 해석하여 완전 다른 각도로 나아가버리는 바보 같은 짓은 경계해야 한다.

그런 관계는 그냥 그대로 두고 바라보는 게 답일 때도 있으니까.


그냥 두고 바라본다는 것은 시간이 흐를 공간을 둔 다는 것이고 나는 이 또한 어떤 명상이나 성찰과도 맞먹는 행위라 생각된다.

기다림이란 것은 수없이 많은 자신의 마음을 누르고, 이해하고, 흘려보내는 수련과도 같은 인고의 시간을 견디는 것과도 같으니…


그러려면 지금 이 시간에 당장 충실해야 한다.

그러나 말이 쉽지 ‘지금 이 시간에 당장 충실하기’가 와닿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럴 땐 이따금씩 나는 현재 내가 하는 행위에 관해 서술하듯 혼잣말을 하곤 한다. 가령 저녁 준비를 할 때면 속으로 ‘나는 지금 저녁 준비를 하기 위해 손을 씻고 도마를 꺼낸다. 그리고는 냉장고 야채칸에서 엊그제 산 대파를 꺼낸다.’와 같은 혼잣말을 한다.


이러한 행위는 당장 지금에 충실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만 오래가는 방법은 아니다. 거한 요리가 아닌 이상 익숙한 것들은 20-30분 이내로 끝나기 마련이고 설거지는 식기세척기가 다 해주니까. 쉬는 틈이 자꾸 생긴다.


한 시간여를 지금 내 행위에 오롯이 집중하게 만드는 기똥찬 방법이 있으니 내겐 그것이 바로 ‘요가’이다. 

정확히는 요가원에 가서 요가하기.


집에서 혼자 하는 요가는 나 같은 햇병아리에 의지박약은 요가원에서 하는 것만큼 충실하지 못하다. 조금이라도 무리가 가거나 힘든 동작이 나오면

'아이쿠야. 힘들어 죽겠다. 하악 하악.'하며 금세 몸을 굴려 요가 매트 위에 널브러져 누워있을게 뻔하니까.


어떤 임계점을 터치하고 못하든 잘하든 끝까지 물고 늘어져 자신의 페이스로 묵직하게 밀고 가는 데엔 요가원에서 하는 요가가 딱이라 생각된다. 내겐 그렇다.


그리고 어떤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불태운 채 후들거리며 집으로 돌아와서는 오늘은 어떤 글을 쓸까… 하고 생각하면, 그 외의 답도 없고 영양가 없는 생각이 밀고 들어 올 틈이 없다.


오늘도 미친 듯이 불태우고 집으로 돌아와 글감을 생각하고 후달거리는 다리를 겨우 이끌어내어 꼼꼼히 씻고 머리를 말리고 허기진 배를 급히 달래기 위해 닭가슴살과 빵을 데워 입속으로 넣어주고 주섬 주섬 챙겨 글을 쓰기 위해 카페로 왔다.

요가를 가기 위해 집에서 나서고 지금 카페 의자에 앉을 때까지, 잡생각이 밀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나로서는 아주 괜찮은 루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오늘 잠시. 아주 잠시 동안 아쉬탕가 시간에 잡생각이 하나 들었다.


우리 요가 타임엔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계신다. 아니다. 60대이실까. 나이를 종잡을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가는 시간마다는 항상 계시는 부지런한 아주머니 한 분이 계신다.


언제부터 요가를 시작하셨을까? 잘은 몰라도 오래되어서 몸에 익은 행위는 아니신 것 같다. 오늘 문득 그분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가 있으신지라 젊은 사람들에 비해 근력도 딸리고 유연성도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하나하나 자신의 페이스대로 이어 나가는 모습에서 나도 모르게 응원의 마음이 솟아올랐다. 그리고는 이내 엄마가 생각났다.

'우리 엄마도 동네 요가원에 간다면 혼자 제일 힘들어하고 혼자 제일 나이가 많을 테지.'

그리고는 이내 급 슬퍼졌다. 왜 이런 상황에 엄마만 빗대면 슬퍼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니. 다들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 왜 멋대로 감정을 붙이고 난리야. 오버하고 있다.’


나 혼자 멋대로 '멋있는 일이다' 내지는 '속상하고 슬픈 일이다' 따위를 갖다 붙이고 있더라.

나이 듦 자체를 나는 너무 서글픈 일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저 저 또래의 어머님들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행위 인걸.


나이 들어 몸이 굳고 근력이 딸리고 유연성이 없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당연한 일 가지고 뭘 그렇게 감정을 갖다 붙이고 있는지 모르겠다. 좀 더 비틀어 생각하면 나 되게 오만한 사람 같기도 하고. 오만한 거지. 함부로 남을 그런 마음으로 바라봐선 안된다. 아. 순간적으로 자기 멋대로 판단하고 바라보는 못난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냥 우리는 다 똑같이

'요가를 하러 온 사람들' 일 뿐이다.


지는 더 못하는 핫바리 주제에.


니 요가나 잘해라. 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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