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할배
영국
현재
이럴 줄 알았으면 소주라도 한잔 마시고 올 걸 그랬다.
너무 쫄려서 목이 타들어 간다. 다리에 힘을 꽉 주고 있는데도 오금이 왜 이렇게 저리는지 모르겠다. 거기다 심장이 얼마나 쿵쾅거리는지 저 개자식이 듣지 못하는 게 신기할 정도다.
이 몽둥이로 얼마나 두들겨 패야 마땅할까? 나의 분이 풀리긴 할까?
쇠몽둥이를 좀 구해달라 했더니 투바이 가꾸목을 갖다 준 준식이새끼 때문에 화가 치민다.
그래, 지금이다. 기다려라. 김정남 검사야.
영국
한 달 전
내 삶이 망가진 지도 어느덧 2년이 다 되어 간다.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오늘도 소 끌려가듯 운전대를 잡기는 했다.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개포동이요."
얘 봐라? 개포동이 다 자기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네. 그것도 아주 무성의한 말투로. 뚜렷한 목적지가 어디인지 한 번에 말하면 좀 좋나. 꼭 구체적으로 어딘지 되풀이해서 물어야 한다. 화가 치솟는다. 그래도 일단 참아야 한다. 왜냐하면 저자는 김정남 검사다. 내가 복수의 칼을 갈던 바로 그자가 제 발로 내 차에 탔다. 그러니까 행선지가 어디인지는 반드시 알아둬야겠다. 개포동으로 가는 것으로 봐서는 아마 자택으로 가는 것 같다.
그런데 저자는 정말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가?
그 난리를 피워놓고 자신의 인생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이 천연덕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분하다. 저자가 내 얼굴을 볼 수 없도록 백미러를 조정하는 척하며 각도를 슬쩍 내렸다. 그리고 최대한 정보를 수집하기로 했다. 구역질이 나지만 속내를 감추고 친근감 있게 말을 걸었다.
"이제 퇴근하시나 봐요?"
"네."
건성으로 대답하고 가방에서 검정색 노트를 꺼내 뚫어져서 보고 있다.
"어휴, 피곤하시겠어요."
"네."
무성의한 말투로 말했다. 내가 집요하게 말을 걸자, 약간 짜증스러웠는지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시선은 여전히 노트에 고정되어 있다. 개새끼. 파고들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 테헤란로는 시원하게 뚫려있었다.
"손님, 개포동 어디로 모실까요?"
"도개공 아파트 3차에 부탁드립니다."
"예, 알겠습니다."
정확한 동호수까지는 몰랐지만, 저 개자식의 소재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미묘한 흥분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물리적으로 쾌재를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삐져나오는 환희를 틀어막고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물을 먹여주지? 간만에 야간 근무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기념비적인 날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준식이나 꼬드겨 술이나 퍼먹어야겠다.
준식
한 달 전
"삐비비비비삑!"
- 18181250
"씨팔씨팔 씨비오뎅." 이건 영국이형이 틀림없다.
"네? 뭐라고요?"
"아, 손님께 한 말이 아닙니다. 삐삐가 와 갖구요. 혼잣말을 한 겁니다."
"운전 중에 한눈 파시면 위험해요."
"죄송합니다."
나는 손님을 목적지에 내려주고 황급히 공중전화를 찾아갔다. 음성사서함 비밀번호를 눌렀다. 역시 영국이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가운 수화기를 귀에 바짝 밀착시켰다.
"나 영국인데, 급히 할 말이 있어. 먼저 거기로 가 있을게. 메시지 듣는 대로 와."
영국이형이 말하는 '거기는' 차이나타운의 술집이다. 우리는 뜻하지 않게 매스컴을 타고 역적 스타덤에 올랐다. 따라서 우리를 반기는 술집은 있을 리 만무했다. 간혹 주인이 입장을 허락해주어도 술을 먹던 다른 테이블 손님들과 시비가 붙기 일쑤였다.
우리는 점점 갈 곳을 잃어갔다. 그러다 우연히 차이나타운을 가게 되었다. 그곳 사람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오로지 노름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식당이나 술집을 가리지 않고 마작을 두었다. 덕분에 우리는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술을 마실 수 있는 공간을 찾았다. 집에서도 그리 멀지 않다는 장점도 있었다.
영국이형이 긴히 할 말이 있다는 건 순전히 구라일 것이다. 술이 고플 때마다 이상한 핑계를 남발한다. 오늘도 수작을 부리는 것이 분명하다. 지난주에 술을 끊는다고 선언할 때부터 알아봤었다.
개가 똥을 끊지.
"형님! 이상한 메시지 좀 보내지 마셔요."
"니미뽕이다. 이 자식아."
"아니, 그나저나 무슨 일이길래 술이에요? 저번주에 술 끊는다고 하셨잖아요. 민서랑 민지도 좀 생각하셔야죠."
"아이참, 그 자식 말 많네? 자식아 술을 맛으로 먹냐? 괴로우니까 먹지. 이제는 가르치려고 드네?"
"아니에요. 나도 형님이랑 술 마시면 좋죠. 저는 형님 건강이 걱정돼서 드리는 말이에요."
"잔말 말고 일단 시원하게 한잔 따라 봐."
"예, 형님."
나는 영국이형이 좋아하는 비율로 맥주잔에 소주를 약간 따르고 맥주를 콸콸 부었다.
첫 잔은 형수님의 석방을 위하여 건배했다. 술기운이 혈관을 타고 머리까지 올라갔다. 양쪽 관자놀이가 시원해진다. 연거푸 몇 잔 들이켰더니 어색한 분위기까지 풀렸다. 영국이형이 괜히 좋아지고 실없는 말을 해서 웃겨주고 싶다. 그런데 형님이 오늘따라 침울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 근무도 재껴 버리고 나를 여기로 불러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슬쩍 물어보자.
"형님, 오늘 무슨 일 있으세요? 갑자기 불러내시고 암말도 안 하시네요?"
내말을 듣자 영국이형은 대답을 하지 않고 소주를 한잔 입에 털어 넣고 입을 헹구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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