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 리턴.
"어이, 박영국 씨! 얼른 가서 전화 좀 받아 봐!"
"네!? 무슨 일인데요!?"
"아, 글쎄 나도 모르지, 아무튼 급하대 빨리 가봐!"
박영국은 덜컥 신경질이 났다. 퇴근 시간까지 작업량 맞추기도 빠듯한데, 전화라니 제길.
철을 긁어대는 기계음 속에서 프레스 기계가 방아 찍기를 반복하고 있다.
영국은 프레스 실행 버튼에 끼워 놓은 이쑤시게 조각을 빼냈다. 물량을 빨리 찍어 내기 위해 끼워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기계 내부에 재료인 철판을 넣고 매번 버튼을 눌러야 한다. 손이 바쁜 관계로 시간이 곱절은 걸린다.
영국이 고안한 이 방식은 비행기의 자동운항장치와 다를 바 없다. 자유로워진 양손으로 잽싸게 철판만 얼른 넣었다 빼면 그만이다.
작업량이 두 배로 늘어나는 획기적인 방법이다. 다만, 너무 위험하다는 단점도 있다. 두 손을 담보로 쌀보리 밥 게임을 하는 셈이다.
지금 안전불감증을 논하기에는 박영국의 전화가 시급하니 불필요한 설명은 이만 줄이고, 영국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자.
영국은 사무실 경리 자리에서 수화기를 이어받았다.
"네! 박영국입니다. 네? 은주는 괜찮아요? 어디라고요? 아, 네! 네! 금방 그리로 가겠습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영국은 전화를 끊고 경리에게 소리쳤다.
"순자씨! 지금 애가 나온다고 해서 먼저 가볼게요! 오반장님께 말씀 좀 부탁드립니다!"
"저기요! 광혜병원이 어디에요?"
영국은 이름모를 행인을 붙잡고 길을 물었다. 행인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길모퉁이를 가리켰다.
가까스로 병원에 도착한 영국은 분만실 앞에서 자신이 은주의 보호자라고 알렸다. 간호사는 우거지상을 쓰고 기다리라고 말했다.
"아까 급하게 전화 받고 왔걸랑요."
영국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간호사는 무표정으로 "알고 있어요."라며 일축했다.
곧이어 담당 간호사가 나타났다.
상황을 말하길, 은주는 이미 분만실로 들어갔고 당직 의사는 아까부터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으며 저기 있는 인턴은 응급실에서 불려온 관계로 쌀쌀맞고 날이 바짝 서 있다고 말했다. 애가 나올 것 같은 나머지 답답해서 뭐라도 물어보면 '기다리세요!'하고 신경질을 퍼붓는다고 푸념했다.
그리고 자신은 이제 갓 병원에 들어온 신참이라고 말하면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다.
따라서 담당 간호사의 심기도 매우 좋지 않은 상태였다.
영국은 우여곡절 끝에 병원에 도착했다. 아내는 분만실로 들어갔다. 인턴도 기다리라고 했다. 어쨌든 현재 상황에 갖출 건 다 갖췄다고 생각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네에? 지금 화장실 타령할 때입니까? 애가 지금 생사가 달렸는데요?"
간호사는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영국은 차가운 말투에 언짢았다. 그러나 대충 능글맞게 웃으며 넘기기로 했다.
"급하게 오느라 용변을 참고 왔거든요, 죄송합니다.“
아까부터 사람들이 작업복 차림의 자신을 흘끔거려서 거울이라도 보려고 했다. 시선은 차치하고 공중보건을 감안해서라도 지저분한 차림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내막도 모른 채 괜한 구박을 하는 간호사가 야속했다.
순간 억이 막혔지만, 의료진과의 건전한 협력 관계를 위해 머쓱한 미소를 보이며 참았다.
화장실 거울 속에 비친 영국의 얼굴은 땀과 쇳가루가 뭉쳐 떡이 되어 주름마다 시커먼 땟국물이 끼어 있었다. 황급히 세수를 했다. 그러나 기름때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도 낯빛이 한결 밝아졌다.
영국은 분만실 앞 벤치에서 앉아 대기했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분만실 문이 열리고 푸른색 모자를 쓴 인턴이 나왔다.
눈을 제외하고는 마스크로 가려져 있었다.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목소리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태도도 그렇게 성의 없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무심한 태도와는 달리 인턴 활약은 대단했다.
은주는 무사히 순산했다. 성별은 딸이며 손가락, 발가락 등 외견상의 문제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아기와 산모 모두 건강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형식적이고 교과서적인 지침을 보험 판매원 같은 빠른 말투로 영혼 없이 쏟아 냈다.
영국은 애가 무사하다는 말만 귀담아들었다. 나머지는 쥐뿔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종전에 냉랭하기만 했던 신참 간호사도 하늘의 계시라도 받은 사람처럼 기뻐했다.
그렇게 첫 아이가 생겼다.
그 이후 영국의 집은 핑크빛이 감돌았다.
저토록 작은 생명 하나가 가져오는 복잡 미묘한 감정은 무엇에 빗댈까? 아이의 부모들은 뽀얗고 투명한 살갗이 만지면 닳는 보물이라도 되는 양 귀중하게 다루었다.
아기는 시도 때도 없이 울었다.
영국과 은주는 짜증은커녕, 어르고 달래기를 반복했다. 아기가 무슨 소리라도 내면 즉각 반응하게 되는 특별한 연결감 같은 것마저 느꼈다.
식구가 늘고 행복도 늘어갔다. 쪼들리는 형편도 은주의 손을 거치면 풍족해졌다.
모든 일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은주는 알뜰했다. 귀저기를 빨아서 쓰고 젖도 풍부하게 나왔다.
소소한 일에 야단법석을 떠는 일 없었고, 시시콜콜한 일에 연연하지 않는 성격도 영국을 편안하게 했다.
행복은 시간을 훌쩍 뛰어넘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가 두 번 도래 할 때쯤, 은주는 둘째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무렵, 영국은 직업의 전환점을 마주했다.
때는 80년대로 접어들어 경기는 날이 갈수록 호황이었다. 국민의 소비가 늘어나고 그 씀씀이도 커졌다.
영국은 택시 기사로 일하고 있는 여동생의 남편. 그러니까 매제가 손을 써, 법인 택시 기사로 이직을 했다.
택시 기사는 새로운 세계였다.
생산직으로 일할 때, 엄청난 기계 소음과 손을 잃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며 근무했다. 쥐꼬리만 한 급여를 받았고 근무시간도 일정하지 않았다. 매일 격무에 시달리며 하루하루가 극심한 스트레스였다.
그러나 택시는 깨끗한 근무복을 착용해야 했고, 근무시간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일단 출근하면 내가 사장이 되는 구조였다.
영국은 손님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거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손님들과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그 또한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일한 만큼 보수로 이어지는 수익구조도 마음에 들었다. 생각보다 수입이 괜찮았다. 그리고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이야기할 수 있었다. 영국은 이 매력적인 직업에 깊은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에 흑과 백이 있듯, 항상 즐거운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야간 근무는 힘들었다. 그리고 만취한 손님들의 시비도 정말 괴로웠다. 그래도 짭짤한 수입을 생각하면 야간 근무는 외면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무엇보다 낮 시간에 은주를 대신해 아이들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수많은 직업 중에 택시 기사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10년 무사고 조건을 채우면 개인택시 넘버를 발부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증가하는 인구에 비해 차량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버스가 끊긴 심야에는 택시를 잡기 위해 너도, 나도 "따블! 따따블!"을 외치고 있다.
일과 가정을 모두 살필 수 있는 최적의 조건과 개인택시 넘버는 영국의 사기를 하늘 높이 추켜세웠다.
영국은 회사에서 배정받은 차를 자기 차처럼 아꼈다. 짬이 날 때마다 닦고 광을 냈다.
너무도 순조로운 나날들이 이어졌다. 아이들도 별 탈 없이 잘만 컸다.
영국의 수입도 꾸준히 늘었다. 방 두 칸에 거실과 주방이 따로 분리되어있는 개나리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그리고 개인택시 의무연한도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This is a work of fiction. Names, characters, places and incidents either are products of the author’s imagination or are used fictitiously. Any resemblance to actual events or locales or persons, living or dead, is entirely coincident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