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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드라이버 2

by 마르코니

영국은 복도에서 걸어오는 최은주를 힐끔거린다.

주변에 군청색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브라운관 TV에 들어가는 부품을 제작하는 태경 제작소. 남사원들은 프레스 기계를 조작하고 여사원들은 부품에 전선을 끼우는 수작업을 한다. 아무런 기술도 요구되지 않는 노동 집약형 근로다.

영국은 교대 시간에 잠시 마주칠 수 있는 짧은 만남으로 은주에게 묘한 호감을 느꼈다. 벌써 1년이나 그랬다.

그러나 말을 걸 엄두는 내지 못했다. 영국은 기계 다루는 솜씨는 끝내줬지만, 연애 시장에서는 젬병이 따로 없었다.

회사의 조직문화도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극도로 보수적이라 여직원과 잡담이라도 했다가는 어디서 연애질이냐고 간부들에게 야단을 맞을 것이다. 또 직원들이 수군거리는 등 여러모로 반향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남정네들 몇 명이 은주에게 수작을 부리다가 퇴짜를 맞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영국은 언제까지 손을 놓고 있다가는 결국 어떤 엉큼한 자식이 은주를 채 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휩싸이고는 했다.

그리고 뜸 들이기에도 1년이라는 시간은 충분히 길었다.


이제 달력도 한 장 밖에 남지 않았다.

영국은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핑계로 데이트 신청을 하자고 결심했다.

문제는 방법이다. 영국은 이 방법 저 방법 고려해보았다. 형편상 편지가 적당하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말문을 튼 사이가 아니었으니 달리 방법도 없었다.

편지를 은주에게(혼자 있을 때) 슬쩍 내밀기로 했다. 신발장에 넣는 수법은 곁에 있는 동료들이 볼 위험이 있다.

만약 은주가 눈치채기라도 하면 귀엽게 윙크라도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뭔가 비밀스러운 일에 동참하고 있다는 분위기를 풍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위안을 하며.


편지의 전문은 이러했다.



은주 씨에게.

불쑥 이런 편지를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제 편지를 받고 깜짝 놀라셨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저는 가공 3반에 근무하는 박영국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글을 올리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은주 씨께 정식으로 데이트라는 것을 신청하기 위해서입니다.

직접 말로 하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아직 용기가 안 나기도 하고 은주 씨의 아름다움에 너무도

눈이 부셔서 당당히 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로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 대한극장에서 절찬리에 상영 중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ET’가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괜찮으시면 크리스마스도 기념할 겸 저와 함께 관람하러

가주시겠습니까?

승낙해 주신다면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크리스마스 오후 2시에 금오대학교 시계탑 앞에서 은주 씨를

기다리겠습니다.

만약 오시지 않으신다면 사정이 있으실 걸로 알고 단념하겠습니다.

오늘따라 작업량도 많고 반장님께서 빨리 해라고 재촉하는 관계로

이만 줄이는 게 좋겠습니다.

부디 시계탑 앞에서 만날 수 있길 바라며...

박영국 올림.



This is a work of fiction. Names, characters, places and incidents either are products of the author’s imagination or are used fictitiously. Any resemblance to actual events or locales or persons, living or dead, is entirely coinciden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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