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에는 강한 편인데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칼바람 때문인지 두려움인지 영국도 알지 못했다.
은주의 등장에도 영국은 단박에 알아보지 못했다. 회사에서 스쳐 지나던 은주의 모습과는 딴 사람이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여느 대학생 못지않은 세련된 차림을 하고 있었다.
평상복을 입은 은주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영국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은주씨 나와 주셨네요. 안 오실 줄 알았어요. 고맙습니다."
은주는 수줍은 듯 입을 가리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영국은 어색한 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아무 말이라도 어서 해야 할 것 같았다.
"추운데 우선 어디 들어가시죠."
영국이 앞장서 학교 근처에 있던 올림픽다방으로 올라갔다. 둘은 구석 자리에 앉았다.
근처 테이블에서 음료는 내려놓던 종업원이 신규 테이블을 확인하고 두 사람이 자리 잡은 테이블에 주문을 받았다.
머뭇거리던 은주를 대신해 영국은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종업원이 물러날 때까지 잠시 기다렸던 입이 열었다.
"저어, 많이 놀라셨죠?, 저도 많이 망설였어요, 편지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다가 결국 편지지를 다 썼지 뭐예요."
은주는 얼굴이 붉어지더니 입가에 웃음을 번졌다.
"결국, 남은 종이가 공책 밖에 없지 뭡니까. 그래서 급한대로 공책 종이를 뜯어서 쪽지로 드린거예요.“
영국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전, 언제부턴가 물끄러미 쳐다 시길래 화나신 줄 알았어요."
둘은 웃음보가 터졌다. 그게 은주의 첫 말이었다.
이런저런 가벼운 이야기를 시작으로 두 사람은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웃고 떠들었다.
이어 서로의 삶을 알아가는 대목에서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공감했다. 화제가 다시 회사 상사의 험담으로 이어지면서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고 표정도 활기를 찾았다.
명목상 영화를 보기 위해 만났지만, 두 사람은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 영화는 까맣게 잊었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영국씨랑 얘기하니까 시간 가는 줄 모르겠네요."
"즐거우셨다니 저도 뿌듯합니다. 늦었는데 이만 일어나시죠. 제가 바려다 드릴게요."
"아니에요, 저는 혼자 가도 돼요."
"집이 봉필동이라고 하셨죠? 저는 남필동인데, 어차피 같은 방향이네요. 같이 가는 길까지만 같이 가요."
"아뇨, 저는 걸어서 갈려구요."
"저도 걷는 거 좋아합니다, 우리 길동무나 하시죠."
대학가 거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한껏 들떠 어수선했다. 젊은 남녀들이 거리를빼곡히 채웠다. 주변 상점에서 캐롤이 흘러나와 흥을 보냈다.
마치 두 사람의 미래라도 빌어주듯 눈송이가 떨어졌다.
와 눈이다! 하고 사람들이 감탄했다.
나란히 걷던 영국은 슬그머니 은주의 손을 잡았다. 은주도 별다른 반응 없이 영국의 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은주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This is a work of fiction. Names, characters, places and incidents either are products of the author’s imagination or are used fictitiously. Any resemblance to actual events or locales or persons, living or dead, is entirely coincident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