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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스타일리스트

먹고 싶었다. 기억하기 싫은 맛.

by 마르코니

"아. 엄마 보고 싶다."

"야 박민지! 시끄러. 너 그러다 또 아빠한테 혼난다?"

"지금은 아빠 없잖아! 알게 뭐야!"

"아빠 있을 때 너도 모르게 자꾸 나오잖아! 그러니까 엄마 이야기는 하지 마."

"언니도 엄마 보고 싶잖아! 흥! 이제 언니랑 말 안 할 거야!"

"얘, 저기 좀 봐. 금순이 할머니야. 가서 리어카 밀어드리자." 민서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할머니! 제가 밀어드릴게요!"

민지가 한 손에 실내화 가방을 쥐고 어설프게 거들며 말했다.

"민서하고 민지 학교 마쳤구나."

머리에 수건을 말아 쓴 노파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힘든데 뭐 하러 밀고 있어? 이 땡볕에 말이야. 얼른 가서 쉬지 않고서."

"할머니 힘들잖아요. 도와드릴 거예요!"

민지가 결의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아이고 인석들."

노파는 만류했지만 그리 싫지 않은 눈치였다.


두 자매는 창백한 표정으로 몇 시간 동안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오늘은 술 안 드셨으면 좋겠다."

민지가 한참 만에 말했다.

"일하신다고 늦으신 걸 거야. 저번 날에도 그랬잖아."

민서가 두둔하는 듯 말했지만 마찬가지로 불안에 떨고 있다.

민지는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왔다. 민서는 TV 소리를 줄였다. 민지가 곯아떨어지고 민서도 얼마 후 이불 속에 들어갔다.

얼마나 잠들었을까. 양은 냄비 뚜껑과 다를 바 없는 얇은 현관문이 쩌렁대며 울렸다. 누군가 문을 박차고 소란이 났다. 두 아이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매번 그랬다. 그놈의 열쇠 구멍을 못 찾아서 행패를 부린 것이다. 유행이 한 세 물은 간 뽕짝을 혀가 꼬인 발음으로 늘어놓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아빠, 다녀오셨어요?"

민서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집 꼬라지가 이게 뭐야아? 애비가 왔는데 인사는 왜 안 해? 이런 호로오 자식들!" 아이의 부친이 초점을 잃은 눈으로 말했다.

"야 박민지 빨리 인사드려."

민서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동생에게 소곤거렸다.

"다녀오셨어요."

마지못해 침울한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아이들은 알았다.

작은 아이는 불꽃이 튀길 만큼 따끔하게 손바닥 일격을 맞고 나가떨어졌다.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조금 큰 아이도 한차례 가격했다. 큰 애는 휘청거리기만 했다. 얼마나 담금질이 되었는지, 아이들은 울지 않았다.

토요일 밤의 일이었다.


이튿날 아이들 부친이 일어난 시각은 오전 11시였다.

그는 '말썽 피우지 말고 얌전히 자빠져 있어'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얼마 후 반지하 창문 너머로 보이던 회색 소나타 택시에 탑승해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두 아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불안의 빗장도 풀렸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리모컨을 집어 들어 TV를 켰다.

"빛나리 아저씨들 밖에 안 나오잖아."

민서가 짜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TV 속은 정치인들이 한바탕 멱살잡이를 하고 있었다.

"만화는 안 해?"

"지금 이 시간에는 안 하지, 이따 한시에 원더 키디 보자."

민서가 채널을 무료하게 돌리며 말했다.

지상파 채널 너머 세 자릿수 채널에서 간신히 전파가 잡힌 외화 시리즈에 잠시 정지했다.

"영어 아저씨다! 이거 보자!"

민지가 반사적으로 말했다.

"안 돼. 이거 어른들 보는 거야. 잠깐만 보다가 다른 데 틀 거야."

민서도 내심 보고 싶은 눈치였다.

"아, 왜! 나도 어른들 보는 거 보고 싶단 말이야!"

민지가 핏대 세우며 우악을 부렸다.

"너, 이따 아빠한테 이른다?!"

"흥! 언니 미워!" 민지는 분해서 울음을 터트렸다.

"얘들 있냐?" 현관 밖에서 노파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몇 차례 두들기고 노파가 들어왔다. 기역 자로 꺾인 허리를 지탱하지 못하고 뒷짐 지던 손을 현관 바닥을 짚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집 꼴이 이게 뭐냐. 쯧, 저건 애비가 아니라 웬수다 웬수. 애들은 무슨 죄람."

노파는 용건도 잊고 혀를 차며 탄식했다.

"할머니 오셨어요?" 민서가 말했다.

"민지는 왜 또 울고 있어?"

"TV로 자꾸만 떼를 써서요."

"언니가 자기 맘대로만 다 한단 말이에요!"

노파는 민지의 투정에 응석이라도 들은 마냥 미소가 번졌다.

"그래 인석아. 그래도 언니 말 잘 들어야 해. 그래 밥은 먹었고?"

아이들은 대답이 없었다. 다만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멀뚱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파는 남루한 전대 지퍼를 열었다. 구겨진 지폐 몇 장을 신중하게 꺼냈다. 큰 아이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이걸로 뭐 좀 사 먹어라. 아빠한테는 말하지 말고."

민서는 오천 원을 손에 쥐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동생과 서로 묘한 표정으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3천 원짜리 스페셜 떡볶이를 걸신들린 것처럼 흡입했다. 분식집 주인은 사정을 빤히 안다는 것처럼 아련하게 쳐다보고 있다.

"민지야 맛있어?" 입가에 빨간 양념을 묻힌 채 말했다.

"응 언니 꿀맛 같아!" 동생은 옷깃에도 고추장이 잔뜩 물들어 있었다.

"우리 순대도 먹을까? 아직 2천 원 남았어."

"응 나도 순대 먹고 싶어 언니!" 떡볶이 접시에 눈을 떼지 못하고 말했다.

"아줌마! 여기 순대도 천 원치 주세요!"

민서가 자신감 넘치게 주문했다.


"서비스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숙한 음성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눈을 뜨자 유리에 내 모습이 비쳤다. 눈물에 마스카라 범벅이 되어 있다. 머리에 쓰고 있던 우스꽝스러운 헬멧이 올라갔다. 반 즈음 뉘어져 있던 좌석도 서서히 바로 잡혔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정 실장이 들어왔다.

"박민서 고객님, 주문하신 음식은 만족스럽게 드셨습니까?"

"네."

나는 아직 감정이 정리되지 않아 길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더 추슬러지기 전에 무슨 말을 언급했다가는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더 필요하시면 잠시 뒤에 다시 들어오겠습니다."

정 실장은 정중한 말투로 눈꼬리를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다 안다는 눈치로 보인 제스처 같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와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었다. 정 실장이 말을 풀었다.

"추억 속에 간직하고 있던 음식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고객님의 잠재의식 속에 내재된 기억을 재구성해야만 해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유럽 여행 중에 우연히 맛보았던 이름 모를 로컬 식당을 어렵게 다시 찾았을 때 이미 폐업한 후였다고 가정하죠. 그럼 우리 미래 푸드에서 고객님의 기억 데이터 베이스를 재구성해서 맛을 재현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본연의 맛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유럽 여행이 필요한 거죠. 아, 가상으로 말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를 중심으로 사용 중이라는 알림이 걸려 있는 수많은 방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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