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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헌터 28

by 마르코니

은주는 태경 제작소에서 순탄하게 적응했다.

그리고 자신이 평범한 삶으로 진입하게 된 것을 마냥 감사하게 여겼다.

일은 단순했다. 은주는 그 점이 만족스러웠다. 관리자들도 은주의 근무 태도를 흡족스러워했다. 동료들도 은주가 일을 잘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렇게 안정된 생활을 이어갔다.

해가 바뀌고 봄이 왔을 때, 은주는 사랑 고백을 받았다.

총무과의 곽진호였다. 싫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끌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회사에서 지나친 관심을 끄는 행동은 자제하고 싶었다.

은주는 그의 고백을 정중하게 사양했다. 아직 누구를 진지하게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 본 적 없다고 말했다.

얼마간 시간이 흘러 제품개발부의 주헌식이 사랑 고백을 했다. 마찬가지로 은주는 정중히 사양했다.

시간은 흘러 다시 겨울로 접어들었다. 어느 날 복도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제조과 남자 직원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무언가를 슬그머니 전했다. 무심결에 받고 보니 쪽지였다. 문득 그 남자가 자신을 힐끔거렸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다 눈을 마주친 적도 있었다.

은주는 그럴 때마다 자신이 뭔가 잘못했거나 혹은 얼굴에 티끌이 묻은 것인지 걱정했다. 그렇다고 직접 물어보는 것은 좀 선을 넘는 행동 같았다.

그래도 직장의 선배이지 않나. 어려운 존재다. 참아야지 했다. 그런데 웬걸. 쪽지라니? 과연 무슨 내용일지 궁금했지만, 바로 펴 볼 수는 없었다. 쪽지 위에 적혀있는 글이 그러지 말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꼭 혼자 있을 때 열어보세요.'

은주는 무슨 내용일까 궁금했다. 어서 퇴근 시간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은주는 빈대떡을 먹으러 가자는 언니들의 권유도 뿌리치고 곧장 집으로 귀가했다. 오늘만큼은 빨리 가야 하는 이유가 뚜렷했다.


쪽지의 내용은 의외였다. 데이트 신청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뭔가 자신의 신상에 대해 알고 있다거나, 자신의 행실을 지적하는 편지일 것 같았다.

맥락상 그런 짐작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편지에는 대답을 요구하는 문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단지 성탄절에 금오대학교 시계탑 앞에서 기다리겠다는 말만 적혀있었다.

은주는 재미있는 사람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은주가 느꼈던 무서운 시선은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훔쳐보는 거였다는 걸 깨달았다.

은주는 사건의 전말을 알고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면 진작에 알은 채라도 하고 지내지'라고 생각했다.

은주는 시간이 24일이나 남은 관계로 그날 상황에 따라 결정하기로 했다. 피차 안 나가더라도 단념하겠다고 적혀있기에 경우에 어긋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을 훌쩍 지나 크리스마스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은주의 동료들은 다들 분주했다. 애인과 다채로운 무언가를 하기로 했다거나, 친구들과 여행을 간다는 등 한껏 들떠 있었다.


"은주는 뭐해?"

"아, 저요? 저는 뭐 아직 일정이 없어요."

"왜? 저번에 주헌식 씨가 만나자고 안 해?"

주변인들이 까르르 웃음보를 터트렸다.

"듣자 하니 그 사람 이번에 대리 진급 케이스라던데."

"아유, 아니에요. 그분하고는 그때 한번 만난 게 다예요."

"왜, 이 기지배야. 인상 좋아 보이던데. 더 만나보지."

"아뇨. 끝났대두요."

"너 그렇게 따지다가 나중에 미정 언니처럼 된다?"

사람들의 시선이 작업장 끄트머리에 쪽으로 향했다. 왕언니라고 불리는 이미정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은 황급히 딴청을 피웠다.

크리스마스가 임박했지만, 은주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뚜렷하게 갈만한 곳이나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축제 분위기에 혼자 있기에는 울적하기는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금오대학교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므로, 나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은주의 추측대로 영국은 생각보다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회사에서의 이미지와는 상반되었다. 다정다감하고 유머러스했다. 그리고 성장 배경도 비슷했다. 둘은 동병상련의 마음을 나누었다.

다만, 은주는 엄마에 대한 모종의 사건과 자신이 점쟁이였다는 과거는 털어놓지 않았다.

딱히 속이려는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단지 오늘 같이 즐거운 자리에서 자신의 어두운 기억을 꺼내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영국에게는 유일한 혈육인 모친이 있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각자의 인생을 살기로 했다고 말했다. 영국도 사정을 다 알겠다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예. 많이 힘드셨겠어요."


성탄절의 첫 만남 이후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졌다. 마음도 통했다. 각자 사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젊었다.

뜸 들일 이유가 없었다. 둘은 얼마 후 결혼을 했다.

결혼식은 생략했지만.



This is a work of fiction. Names, characters, places and incidents either are products of the author’s imagination or are used fictitiously. Any resemblance to actual events or locales or persons, living or dead, is entirely coinciden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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