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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all talk Mar 27. 2020

1. 이세욱 번역가

이세욱 번역가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오래오래>를 논할 수 없다.

이세욱 번역가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시작할 수 없다.


<오래오래>는 분명 에릭 오르세나(본명 에릭 아르누)의 책이지만 이세욱 님의 번역작품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는 Erik Orsenna에 의해 탄생한 <Longtemps>라는 작품이지만 한국에서는 에릭 오르세나라는 사람이 쓴 <Longtemps>의 '이세욱 옮김작' <오래오래>인 것이다.


고백하건대, 내가 <오래오래>라는 책을 고르게 된 별 뜻 없는 상황조건은 세 가지였다.

1. 출판사 <열린책들>

2. 내가 좋아하는 초록이 가득 칠해진, 편안한 느낌의 표지 디자인

3. 이세욱이라는 번역가


<열린책들> 출판사를 신뢰하게 된 것도 지금 와서 보면 이세욱 님 덕분이니, 나의 경우 <오래오래>라는 작품은 거의 전적으로 이세욱 님 덕에 읽게 된 것이다. 2013년 초 서점에서 <오래오래>를 집어 들 때까지도 책이며 작가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을 확률은 0%였다. 나는 이세욱 님의 새로운 번역작이 있는지 적어도 몇 년에 한 번씩은 훑어 확인하여, 가급적 모두 읽기 때문이다.


 (안나 가발다는 읽지 않았다. 나는 30대 후반이 된 이 나이까지도 '따뜻한 느낌'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이런 편견은 내 손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때가 되면 읽게 되겠지.)


고등학교 시절(90년대 후반) 처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읽었다. 눈이 번쩍 뜨이게 재미있었다. 이후로 한동안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은 눈에 보이는 족족 읽었다. 나는 그저 베르베르가 천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년 동안 베르베르의 책 표지에 항상 등장하는 '이세욱 옮김'에 익숙해지고 이후 다양한 번역서들을 겪다 보니, 내가 베르베르를 그렇게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전적으로 이세욱 님의 피나는(?) 번역 덕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베르베르의 신작들에 흥미를 잃게 된 지는 이제 십 년이 넘어간다. 하지만 예전 <개미>를 읽을 때 개미 화자의 문장들에서 느꼈던 강렬한 긴장감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이세욱 님은 작가와 독자에게 큰 안심을 주는 번역가이다. 안심 이상으로, 나는 이세욱 님이 애정을 가지는 작가와 작품을 신뢰하며 사랑한다. 거의 모든 국내 번역작품을 찾아 읽게 되었던 미셸 투르니에와 움베르토 에코, 어렵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시작했지만 결국 흥미롭게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 으스스한 느낌으로 기억나는 <미세레레>, 담담하면서도 은근한 쓸쓸함으로 기억나는 <리흐테르 회고담>, 2년 전쯤 읽었던 장미셸 게나시아의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등등을 골고루 좋아했다. 작가의 아이디어들, 문장들의 단정함, 그 단정한 문장에서 전달되는 온전하고 강렬한 느낌들.


이 책들 덕분에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오래오래>는 첫 문장에서부터 빠져들었다. 화자가 한바탕 꿈에 빠져 휩쓸렸다는데, 내가 순간 함께 휘말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오래오래> 외에는 나보코프의 롤리타 영문본 첫 문장만 기억에 남아 있다. 롤리타의 첫 문단은 아주 놀라웠다. 하지만 그 첫 문장, 첫 문단은 내 감각신경세포를 강력하게 활성화시키는 종류였기 때문에 <오래오래>의 첫 문장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기억한다. 롤리타의 그 첫 영문장을 그 맛이 나도록 하려면 대체 어떻게 번역하는 게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한 번씩 해 보지만,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국내 번역본은 이것저것 보았으나 영문장 만한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오래오래>는 정말 정말 재미있었다. 읽는 내내 이야기, 묘사, 단어와 문장, 등장인물들의 매력, 작가의 박식함과 유머러스함과 신선함과 장난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다시 읽고 다시 읽었다. 여러 권 구매한 책 중 몇 권은 집중하면서 보느라 연필줄을 마음껏 그었다. 다른 책도 간간이 읽긴 했지만 <오래오래>는 1년 넘도록 계속 손에 들고 있었던 것 같다. <오래오래>의 번역에서 가장 감탄한 부분은 어휘도 어휘지만 마치 입으로 내뱉는 듯한, 리듬감이 살아 있는 문장이었다. 정말 재미있다고 느낀 부분이었는데, 후일 이세욱 님의 번역 관련 짧은 강연 내용을 읽어보니 여러모로 의도된 것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최근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된 <프랑스 남자의 사랑>을 엄청난 기대에 부풀어 읽었는데, <오래오래>와는 느낌이 판이하게 달랐다.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번역 문체의 차이일까, 아니면 작가가 이번엔 <오래오래>와는 분명히 다른 어조를 사용하기로 작정한 걸까. 작가의 다른 작품들 번역본에서는 분명 장난기가 확실히 느껴졌었는데, 이번 책은 다른가? <프랑스 남자의 사랑>을 다시 읽지는 않았다. 대신 amazon.com에서 <Love and Empire>라는 영역본을 읽어보려고 중고상품을 얼마 전 주문했다. (에릭 오르세나의 책들은 영어 번역도 많지가 않다.) 다른 책들도 이세욱 님이 번역해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프랑스어를 배운다 하더라도 이세욱 님 번역만큼 즐겁게 읽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이세욱 님과 같은 번역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너무너무 맛있게 번역된 <오래오래> 덕분에 처음 읽은 지 7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나는 행복해하고 있지 않은가. <오래오래> 다시 읽느라, 에릭 오르세나의 다른 작품들 찾아보느라, 지금은 이렇게 관련된 글도 써보느라 엄청 행복하다. 게다가 'sensibility라는 측면에서 희귀한 번역가'라는 안나 가발다의 평은 이세욱 번역가와 그의 번역작에 대해 마음껏 자랑스러워해도 좋다는 공인을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작가에 대한 깊은 애정과 다각적인 이해, 높은 수준의 지성, 몸과 마음을 다하는 치열한 공감 형성에의 노력, 독자들에 대한 배려와 (쉽게 타협하지는 않는) 확고한 기준, 이런 것들이 이세욱 님의 번역 작업의 근간을 이룬다. 천성이신가 싶다. 하지만 말이라 쉬워 보인다. 행간을 읽어낼 때의 희열과 그에 도달하기 위해 긴 시간 고생하고 고뇌해야 함을 이야기할 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일지, 독자와 작가의 공감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돕는 번역가의 필연적인 감수성에 많은 현실적인 여의치 않은 상황들과 일부 다수의 몰이해가 얼마나 괴로움이 될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나는 감사하고 안타깝다. 어릴 적엔 그저 번역을 많이 해 주셨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입장이 좀 달라졌다. 작가에 비해 번역가의 사사로운 이야기들은 전해지는 게 없어, 몸이 안 좋으실 거라는 생각을 못 했다. 생각해보면 작가든 번역가든 고뇌에 부족함은 없을 터인 데다가, 이런 정도의 몰입에는 엄청난 정신적, 신체적 에너지가 소모되니 시간이 지나면 필히 몸으로 문제가 나타나기 마련일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해본다. 어느 수준 이상의 창작에서는 건강 상하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 건강을 지키는 것은 물론 정말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지만, 어떤 수준에 닿으려면 몸이 그저 사르어질 뿐이다. 나는 건강한 생활 해야 한다는 의견도, 더 멋진 작품 내어달라는 소망도, 쉽게 이야기하기가 곤란하다. (어디가 좋지 않으신지, 도와드릴 수 있는 것들이 조금이라도 있진 않을지, 직업병 탓에 예의 없이 궁금하지만 알 길도 도울 길도 별로 없다.) 그저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오래오래>를 읽으면서 우연히 검색을 통해 알게 된 문학정원이라는 웹사이트도 꼼꼼하게 살펴 읽었었는데, 지금은 네이버에 있나보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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