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전 생각
임신 후반기에 접어드니 짠짠이가 점점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니 아내는 짠짠이가 발로 차는지 손으로 치는지 구분이 갈 정도. 어느 날은 차고, 어느 날은 긁고, 어느 날은 밀고, 이리저리 뒹굴면서 아주 그냥 공사가 다망하시다고. 짠짠이가 몸으로 느껴지니 마음이 더 각별해지고 이것저것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임신 전반기까지는 "어떻게 무사히 낳을까."가 관건이었다면 후반기에 들어서는 "어떤 아들이 나올까. 나오면 어떻게 키울까."로 이야깃거리가 옮겨졌다.
나랑 똑같은 아들이 나오면 좋겠다.
약간 극단적인 표현이라 적당히 순화를 하자면, 날 많이 닮았으면 좋겠다. 게다가 아들이니까. 이 이야기를 듣는 아내나 주변 사람들은 좀 경악했는데(...). 난 당연히 모두가 자기를 많이 닮은, 혹은 똑같은 아이를 바라는 줄 알았다. 하지만 얘기를 좀 나눠보니 선뜻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더라. 당장 아내만 해도 아이가 자기를 닮으면 걱정되는 면이 있다고 해서 놀랐다. 난 아내랑 똑같이 나와도 아주 좋겠는데. 아내 말로는 내가 자기애가 넘쳐서 그렇다고, 그리고 나랑 똑같으면 감당이 안 되니 그런 소리 좀 하지 말라고(...).
어떤 아들이 나올지는 이미 우리 손을 떠난 일이니 그냥 부디 우리 둘로부터 적절히 조합되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고. 아들이 나오면 어떻게 키울까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했다. 어떤 사람으로 키우고 어떤 교육을 시키고 이런 건 아직 너무 어려운 이야기고, 그냥 우선 내가 하고 싶다고 예전부터 생각했던 세 가지.
어릴 때 피아노는 무조건 시킬 거다. 대학교 합창단에서 아내와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고, 음악이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경험을 아들도 했으면 싶어서. 내 경험만 두고 하는 이야기지만, 아무래도 음악의 기본은 피아노가 아닐까. 접근성이나 범용성의 측면에서도 그렇고. 나는 7살부터 3년 정도 피아노를 배웠는데 그 덕에 음악을 곁에 두고 살게 되었다. 무슨 특별한 음악적 취미생활을 하는 건 아니지만 뼛속까지 건조한 공돌이인 내 성격 상 피아노가 아니었으면 음악에 아예 문외한이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당시에는 피아노 학원이 너무 다니기 싫었다는 게 함정(...). 아버지가 피아노 그만두면 후회할 거라고 그랬는데도 그냥 때려치웠는데 정말 고등학교 가고 나니 아쉽더라. 피아노 잘 치는 형들이 너무 멋있고 재밌어 보이더라고. 음악이 대강 스며들 정도까진 억지로라도 피아노를 시킬 생각이다. 피아노는 못 치더라도 음악은 즐기는 삶을 살도록. 지금 나처럼.
어린 시절 책 보면서 시간을 많이 때웠다. 장난감이라고 해봤자 그렇게 많지도 않고 책이 방에 가득하니 자연스럽게 읽게 되더라. 전집과 학습만화가 대부분이긴 했는데 그 정도도 충분한 듯. 전집과 학습만화가 같이 있으면 상대적으로 학습만화가 너무 재밌어서 닳고 외우도록 보게 된다는 게 개이득(...). 대부분 80년대생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컴퓨터가 생기면서 독서와는 완전히 담을 쌓게 되었는데 그나마 그전에 닳도록 읽은 책 덕분에 최소한의 국어능력을 확보한 게 아닌가 싶다. 특히 학습만화뿐만 아니라 소년만화(소위 만화책이라 불리는 것)도 좋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지루한 산문보다는 만화를 통해 글을 쉽게 접하는 것, 만화의 구성/연출을 통해 상상력을 자극하는 게 좋았다. 요새는 웹툰을 통해 만화가 대중화되고 문화 콘텐츠로서 위상이 많이 올라갔는데 당시만 해도 좀 천대받았던 게 사실. 아들에게는 책장 또는 이북 리더에 좋은 만화책을 꽉 채워주고 싶다.
지금까지도 우리 아버지의 모토는 "주말엔 밖으로 나가자!". 내가 기억이 있는 시기부터 거의 매주 주말에는 항상 외출을 했다. 거창한 여행이 아니더라도 근교 저수지, 공원, 산, 바다에 가서 걷고 공 차고 라면 끓여먹고 그랬다. 당시에는 주 5일제도 아니었고 일요일은 교회 가느라 외출을 별로 안 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토요일 오후마다 가족을 끌고 나간 우리 아버지 대단하다. 덕분에 고향인 전라남도와 먼 강원도만 별로 못 가봤지 전국 팔도 안 가본 곳이 없다. 특히 전국의 좋은 산들은 다 가본 듯. 사실 언제 어디를 가고 뭐가 좋았고 그런 건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주말마다 가족들과 어딘가를 끊임없이 갔다는 사실과 "너 인마 아버지 덕에 이런 곳도 오는 걸 기억이나 할라나." 라던 아버지의 이야기 정도가 남았다. 이 정도면 우리 아버지는 밑지는 장사를 하신 거 아닌가 싶은데. 그렇지만 주말마다 가족들과 나갔던 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어서 내 아들에게도 그걸 주고 싶다. 국내든 해외든 동네든 어디든. 그리고 글과 사진을 많이 남겨야지.
이렇게 쓰고 나니, 결국은 내가 어린 시절 좋았던 거를 아들에게 그대로 해주고 싶은 거구나. 아들에 대한 계획이 이렇게 뻔해도 되나 싶기도 하지만, 내 아들이니 잘 맞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하게 된다. 여기에 쓴 거를 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고 그전에 수년의 전투 육아가 앞서겠지만, 그래도 즐거운 상상이야 해볼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