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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낳으러 갑니다

짠짠이 나와라!

by 다비드

2019년 5월 8일 수요일. 어버이날이자 유도분만 전날. 별도로 휴가를 내진 않고 칼퇴한 후에 최후의 만찬(?)을 하러 갔다. 애가 생기면 못 간다는 불에 구워 먹는 고깃집. 그중에서도 아내가 먹고 싶다는 곱창집을 향해 인덕원 먹자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뭔가 급히 특식을 찾을 때면 항상 곱창이다. 일찌감치 고오급 식당을 예약하는 무슨 기념일과는 다른 느낌. 이사 전날, 회사에서 스트레스받은 날, 소소하게 축하하는 날, 누가 맛있는 거 사준다는 날. 이런 날에는 주로 아내와 곱창에 소주/소맥 한 잔을 했는데 이번에도 일관된 취향이 어디 가지 않는다. 다만 술 대신 사이다. 곱창 먹는 날은 대개 싱숭생숭이다. 이 날도 당장 내일로 다가온 출산이 실감이 안 난다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술 한 모금 안 마시고도 취한 듯이 들어왔다. 출산 가방도 다 쌌고 병원과 조리원도 다 세팅이 되어 있는데 우린 뭔가 준비가 안 된 거 같았다. 결혼 전날에는 전혀 이런 기분이 안 들었고 "내일아 어서 와라!" 이랬는데. 결혼보다 출산이 더 거대한 일이라더니 진짠가 보다. 내일이면 애가 생기고 부모가 되는 건가?!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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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의 신혼부부와 2019년 2월의 예비부모


그간 치렀던 수많은 시험과 마찬가지로, 정해진 아침은 찾아온다. 준비가 되었든 안 되었든. 일어나서 씻고 아침을 든든히 먹었다. 아내에게는 출산 전 마지막 식사. 출산이 길어질 수도 있으니 든든히 먹어둬야 한단다. 출산 가방을 챙겨 들고 병원으로 향하기 전에 집을 간단히 치웠다. 출산 후에 바로 조리원에 가서 집을 상당 기간 비워둘 수 있으니 치워두는 게 좋다고. 병원 가는 길에 짠짠이에게 제발 오늘 안에 만나자고 계속 말했다.

병원에 도착해서는 정해진 프로세스에 따라 착착 진행되었다. 아내가 가는 동선을 따라다니며 심부름꾼을 하는 게 내 역할. 유도분만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아내가 촉진제를 맞고 나서는 주기적으로 간호사 선생님이 와서 자궁문 상태를 확인하면서 기다리는 시간. 다행히 진통이 있진 않아서 차분히 누워서 수다 떨고 카톡으로 애 낳으러 왔다고 여기저기 알리며 시간을 보냈다. 대강 3시간이 지나 오후가 되니 자궁문이 4cm 정도 열렸고 순조로운 진도라고 하여 안심이 되었다. 게다가 수월하게 곧 출산을 할 것 같다고 가족분만실을 배정해줬는데 티비와 책상도 딸려있고 공간도 꽤 넓은 데다 자리를 옮기지 않고 이 방에서 분만까지 한다고 하니 더 좋았다. 그렇지만 5시간이 넘어가니 아내가 좀 불편하기도 하고 약간씩 통증이 있어서 무통주사를 조기에 맞기로. 그런데 무통주사가 등에 삽입하는 방식이다 보니 아내는 꽤 불편함을 느꼈고 괜히 이게 제대로 된 자리에 들어간 건가 신경 쓰여서 내내 거슬렸다고 한다. 지레 겁먹고 너무 일찍 무통을 맞았나 싶기도 하고. 하지만 시시각각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지난 결정에 후회하고 신경 쓰면 앞으로가 손해이므로 그냥 잊고 잘한 거였다 하며 정신승리를 하는 게 최선이 아닌가 싶다.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되려는데 자궁문은 5cm까지 열리고 나서 진도가 더 나가지 않았다. 무통 때문인지 이렇다 할 진통도 없고. 그래서 1박 하며 상황을 보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시작하기로. 오늘 결단(?)을 낼 줄 알았는데 조금 김이 새긴 했지만 심한 진통을 겪지 않으니 다행이다 하면서 어느 모텔에 놀러 온 것처럼 티비 보고 스마트폰 하고 수다 떨면서 밤을 보냈다.


20190509_114115.jpg 아직까진 평화롭습니다. 아직까지는.


병실에서 하루가 지나고 대망의 5월 10일. 이날은 어떻게든 짠짠이를 만나기로 되어 있다. 부디 순조롭게 엄마 고생 안 시키고 무사히 나오면 좋으련만. 오전부터 촉진제를 맞고 2차 유도분만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병원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예상되지만, 우리가 입원한 분만실 주변에 여러 분만실이 있었고 산모들의 비명이 시시각각 들렸다. 실시간으로 들리는 곡소리와 필터를 거치지 않고 본능으로 나오는 처절한 멘트들을 들으며 시간을 보낸 셈. 병실에 꽤 오랜 시간 있으면서도 몸이 많이 힘든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밖의 상황들이 계속 들리다 보니 마음이 초조하고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더라. 고생고생하다가 결국에는 아기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들리면 부럽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고 복잡미묘한 기분. 아내도 이젠 본격적인 진통이 와도 좋으니 짠짠이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오가 넘었으나 자궁문은 5cm에서 더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제대로 아픈 것은 아니고 영 불편하긴 한 정도의 진통도 오락가락하길 몇 시간. 결국은 담당 의사 선생님과 상담 끝에 제왕절개를 하기로 했다. 수술 준비를 마치고 아내를 들여보내는 기분이란. 선생님께서 보통 1시간 안 걸리고 안전하게 끝나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 때는 처음 겪는 두려움이 수많은 과학적 근거를 압도하는 느낌이었다. 수술실 밖 대기실을 서성이며 멍하니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솔직히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떤 마음, 기분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가진 옷들 중에서 가장 편한 반팔 티와 추리닝에 슬리퍼를 신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땀이 차고 거치적거리고 편치 않은 느낌이었던 기억만 난다. 결국에는 아내와 짠짠이 이름을 불러서 튀어나가는 찰나 땀이 찬 슬리퍼가 미끄러져서 말썽을 부렸다. 슬리퍼고 뭐고 부리나케 달려가니 간호사 선생님이 끈적끈적하고 빨간 걸 포대기에 싸고 날 맞아주었다.


1557462034501.jpg (GMT+9) 2019.05.10 13:15 짠짠이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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