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맑음의 바다 Apr 13. 2024

검은 눈물을 흘리며

Durango-Silverton, Colorado



기차는 느긋하게 달려갔다. 산 후안 산맥과 인사 나누며 애니마스 강을 옆에 끼고서. 시간도 느릿하게 흘러갔다. 경이로운 자연을 우리가 구석구석 만날 수 있을 만큼의 속도로. 웅장한 산속 빽빽이 가득 차 있는 나무와 푸른 하늘을 보았고, 하얀 구름과 연초록 강물을 보았다. 나는 남편과 딸과 함께 재잘재잘 나누던 이야기를 어느 순간 멈추게 되었고, 비로소 들었다. 우리를 마주 보는 자연의 기품 있는 침묵을.


연한 풀빛의 강은 점점 짙은 에메랄드빛으로 변했다. 우리 옆으로 나란히 흐르다가 이제 아득히 저 아래에 내려다 보였다. 평지를 달리던 기차는 어느새 깎아지른 협곡 사이를 내달리고 있었다. 아슬아슬, 노련하게.


석탄을 가득 실어 나르던 기찻길이었다. 이제는 수도 없이 많은 관광객을 태워 다니며 기차는 더 바빠졌다. 그 옛날 이 가파른 산길에 목숨을 걸고 철도를 놓았던 노동자를 생각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석탄을 캐던 광산 노동자를 생각했다.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곳에 켜켜이 쌓인 시간을 생각했다. 그 세월을 담담하게 지켜온 자연을 생각했다. 이 모든 사람들과 자연 덕분에 오늘 협곡열차를 타고 즐길 수 있는 우리의 행운을 생각했다. 감사한 오늘은 그저 생겨나지 않았다.





잔잔한 자연 속을 디젤 기차는 요란하게 헤치며 달렸다. 멈춤 없이 뿜어내는 연기와 소음으로 메아리치며. 우리가 탄 곤돌라 객차는 창문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눈과 코는 매연으로 따가웠고 머리는 어질어질했다. 두랑고에서 실버톤까지 왕복 7시간 열차를 타고 돌아와 보니, 샤워를 할 때 온몸에서 검은 물이 흘러내렸다.


수년 전, 내가 살던 대도시를 떠나기로 결심했던 때가 생각났다. 나는 아장아장 걷는 딸아이의 꽃잎 같은 손을 잡고 동네 도서관에 가는 길이었다.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는 데 집 앞 10차로를 가득 채운 자동차의 매연이 나의 숨을 턱 막히게 했다. 하늘은 뿌옇고 공기는 매캐했다. 수천번도 넘게 다닌 그 길이 끔찍해졌다. 나의 딸의 조그맣고 연약한 폐에 들어갈 공기가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1년 뒤에 우리는 자연이 가까이 있고 인구가 적은 소도시로 이사했다. 공기는 깨끗했고 나는 안심했다.


사실은, 우습게도, 달라진 건 없었다. 나는 어디에서든 계속 내연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매연을 뿜어내고 있었으니까. 그때도 지금까지도 어쩌면 앞으로도. 다만 창문을 내리지 않았고 내가 만들어내는 오염물질을 직접 대면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디젤 열차를 타며 하루종일 내 몸 깊이 파고든 매연은 그동안 내가 애써 외면해 왔던 불편한 진실이었다. 어릴 적 겨울 펑펑 내리던 눈이 더 이상 내 고향에 내리지 않는 것과 같은. 언제부턴가 쓰게 된 미세먼지 마스크가 이젠 익숙해진 것과 같은.








오늘 만난 자연은 그래서 더욱 거대했다.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오염을 덮어쓰면서도 여전히 우아하고 장엄했다. 끊임없이 자정활동을 하면서 어디선가 검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도 지금까지도 어쩌면 앞으로도.


우리 인간은
정녕
그 눈물을
멈추게 할 수는 없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