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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의 바다 Nov 28. 2024

달도 차면 기운다

Art Hill _ Saint Louis Art Museum
St. Louis, MO



마음이 몽글거렸다. 미술관에서 나의 딸아이 손에 처음으로 카메라를 들려준 날이었다. 아름다운 예술을 감상하는 순간이 향기로운 추억으로 남길 바랬다. 아이는 둘러보다가 마음에 드는 작품 앞에 멈춰서 진지하게 구도를 잡고 사진을 찍었다.


나의 딸이 반짝이는 눈으로 작품을 마주하고 무언가 간직하려고 결정하는 마음을 지켜보았다. 자그만 그녀 안에 있는 커다란 세계의 움직임은 내가 볼 수 있는 그 어떤 예술보다 경이로웠다. 미술관의 방대한 작품 컬렉션은 우리가 이곳에서 머무는 시간이 자꾸만 길어지는 데도 끝이 날 줄을 몰랐다.








우리 가족이 세인트 루이스 미술관을 자주 오는 이유는 순전히 미술관 앞 공원 때문이었다. 미술관이 위치한 포레스트 공원(Forest Park)은 세인트 루이스 동물원을 비롯하여 미주리 역사박물관, 세인트 루이스 과학센터 등을 다 품을 정도로 거대한데, 그중에서도 우린 이 만큼의 공간을 특히 사랑했다. ‘세인트 루이스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포레스트 공원의 일부인 미술관 앞 언덕은 우리의 심장을 온전히 뛰게 하는 곳이었다.


진파랑의 하늘은 한없이 높았고 공원을 둘러싼 나무들은 울긋불긋 가을색으로 물들었다. 가을에 보는, 탁 트인 잔디의 초록이 눈부셨다. 완만하게 아래로 향하고 있는 언덕은 겨울에 아이들이 썰매 타기에 적당한 기울기였다. 언덕 끝에 펼쳐진 연못은 무지갯빛 분수를 뿜어내고 있었다.





오랜만에 도시락을 챙겨 소풍을 나왔다. 사람들은 잔디에 드러눕거나 의자에 앉아있거나 산책을 했다. 드넓은 우주에 우리 셋만 있는 것처럼 차분한 오후였다. 가을 공기가 향긋했다. 미술관에 있을 때와는 또 다른 행복감이 선선한 바람처럼 불어왔다.


나는 소풍날 아침의 설레었던 꼬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엄마의 김밥 싸는 고소한 냄새에 아침잠을 깨고, 세수도 하지 않고 엄마한테 달려가서 맛살이며 계란지단을 집어 먹으면서 김밥 마는 모습을 구경했었다. 자르르 윤이 나는 김밥이 가지런히 내 도시락에 담길 때까지 난 엄마 옆에 딱 붙어서 신나게 재잘거렸었다. 나에게 소풍은 이런 의미였다. 그 설레는 아침의 예술작품 같은 김밥과, 다정한 표정의 엄마와, 달콤한 수다였다.


매트를 단정히 펼치고 앉은 우리는 정성스레 챙겨 온 도시락을 먹었다. 매트 위에서 우리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피어나는 꽃 같았다. 공기가 얼마나 맑은지, 햇살이 얼마나 따스한지, 도시락이 얼마나 맛있는지에 대해. 가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연의 냄새가 얼마나 상큼한지, 미술관의 어떤 작품이 인상적이었는지, 우리의 소중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에 대해.


나의 딸은 매트 위에서 뒹굴거리기도 하고 두 팔 벌려 누운 채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배를 채워 든든해진 후에는 아빠와 캐치볼을 하고 원반 던지기도 하고 비눗방울을 불어 바람에 날리기도 했다. 푸르른 잔디는 광활해서 숨이 찼다. 파란 하늘과 단풍 든 나무는 우리를 포근히 안아주었다.


낙엽이 이불처럼 보송하게 깔린, 줄지어 서있는 나무사이를 걸었다. 붉게 물들어 떨어진 잎들은 켜켜이 쌓인 채 바스락거렸다. 아이는 신이 나서 그 길을 몇 번이고 걷다가 뛰다가 날아다녔다. 남편은 낙엽을 한 아름 모아 아이 머리 위로 뿌려주었다. 바삭한 낙엽이 공중에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서늘해진 가을공기에 흩날리는 딸의 웃음소리가 나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오늘은 남편의 생일이었다. 우리는 남편의 생일마다 이 언덕으로 달려 나왔다. 무수히 많은 날 중에 우연이었다. 미술관과 가을과 남편은 잘 어울렸다. 예술세계의 품은 그의 것처럼 넉넉했고, 화려한 가을색 이면의  고독은 가끔 우수에 젖는 그와 닮아있었다.


처음 만난 지 10년이 지나 결혼을 했다. 누군가를 만나는 건 서로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 그는 결혼할 생각으로 만나자고 했다. 부담스러워 싫은 적도 있고 중간에 잠깐 멀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한결같았다. 나와의 결혼이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선택이라고 했다. 나에게 남편은, 사계절을 지나와도 지워지지 않는 가을의 잔상 같은 사람이었다. 붉은 잎 하나가 내 어깨 위로 떨어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에 태어난 사람이 내 옆에 서있었다.








늦은 오후였다. 눈부셨던 햇살이 서서히 넘어가면서 우산 같은 그늘이 펼쳐졌다. 가을 해는 기울어가고, 이곳에서 영혼이 따뜻해진 우리의 시간은 여기까지였다. 쌀쌀해진 바람에 옷깃을 여몄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하루가 기우는 게 서운해졌다. 남편의 생일이 지나가는 게 아쉬웠다. 마음속에 꽉 차오른 찐빵 같은 행복을 끌어안고 우리는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기울어야
다시 차오를 수 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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