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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의 바다 Oct 31. 2024

투명한 눈물이 흐르는 시간


Ozark National Scenic Riverways -
Blue Spring,
Eminence, MO



공기가 사각거렸다. 더없이 높아진 하늘에 가을이 물들어가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그동안 미뤄왔던 약속을 오늘 지키기로 했다. 계절이 바뀌면 새로운 다짐이 이렇게 쉬웠다. 오랜만에 긴팔 카디건을 걸쳤다.


미주리 블루 스프링(Blue Spring)은 깊고 웅장한 숲 속에 있었다. 고속도로에서 국도로 갈아타고 비포장길을 달린 후 좁은 흙길의 트레일을 걸어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네트워크 신호가 잡히지 않을 것이었다. 인터넷의 세계에서 잠시 미아가 돼도 더 이상 개의치 않게 되었다. 위대한 자연세계에서 온전한 자아가 될 수 있는 기회였다.








숲 속에는 아침의 산뜻함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울긋불긋 물들어가는 나무들에 둘러싸인 가느다란 트레일 끝에, 마법이 시작되었다. 괜스레 눈을 감았다 떠보았다. 사진으로 볼 때도 믿기 어려웠지만, 그래서 믿기 위해 보러 왔지만, 실물을 보고 있어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눈을 끔뻑거리는 것이었다.


마치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하늘을 보는 것 같았다. 수면에 비친 나뭇잎 그림자만이 물의 존재를 알려 주고 있었다. 깨끗한 샘물 속에 넘실대는 식물의 초록빛이 선명했다. 찰랑거리는 신선함은 거대한 암벽 아래 푸른 구멍에서 흘러나온 참이었다.


나무 데크길을 따라 샘이 시작하는 곳으로 갔다. 짙은 파랑은 해가 없이 흐린 날에도 이렇게나 반짝거렸다. 층층이 깊은 투명함은 속을 내비치면서 주변 풍경의 거울이 되어 주었다. 거리낌 없이 환히 내보이는 샘물처럼, 내 마음도 남의 마음도 들여다볼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나의 이런저런 붕 뜬 생각은 물속에 돌이 가라앉듯 곧 차분해졌다. 파란빛은 그저 침묵했다.


310피트(대략 94미터). 얼마나 거대한 지 가까이서 보지 못한 ‘자유의 여신상’의 바닥에서 횃불까지 높이보다 5피트가 더 큰 숫자였다. 미국에서 제일 깊은 샘 중에 하나인 이곳을 원주민들은 여름 하늘이라고 불렀다. 맑고 깨끗한 하늘은 그 끝을 알 수도 없고 닿을 수도 없었다.








하얀 드레스와 검은 턱시도가 잘 어울렸다. 한 커플이 웨딩촬영을 하고 있었다. 깊고 깊은 초록 숲 속 푸른 샘 옆에서, 두 사람은 환하게 빛났다. 한 무리의 사람들은 커플 주변에서 분주했지만 요란하지 않았다. 고요한 자연 속에 그들과 우리뿐이었다. 우주 같은 적막감이 흘렀다. 블루 스프링을 촬영장소로 정한 이 커플에게 결혼은 어떤 의미일까.





남편에게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 아이를 낳고 복직을 6개월 앞둔 어느 날이었다. 같이 재미있게 살려고 결혼했는데 어른의 시간은 무겁기만 했다. 각자의 직장에서 책임이 늘어났고, 제대로 된 밥 대신 야근을 밥 먹듯이 했다. 끊임없이 돌고 도는 팽이처럼 우린 예민하고 지쳐있었다. 아이가 태어났고, 경쟁의 인생에서 난생처음 멈춰 섰다. 우물 안에 개구리가 보였다. 그 세상에 맞춰가며 그리도 안간힘을 썼던 내가 있었다. 직업은 곧 나 자신이 될 수 없었다. 밖으로 나와 더 큰 하늘 아래 비로소 참아왔던 숨을 길게 뱉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한 아이의 세계를 키워내는 일이었다. 한 가족이 인간답게 살아가야 할 문제였다. 남편은 반대했다. 직장에 뼈를 묻는다 해도 퇴사 시점은 남편에게 먼저 올 것이었다. 굳이 그만둬야 한다면 그건 본인이라고 했다. 내가 포기하길 바라며 에둘러 한 그의 말에 나는 그러자고 했다. 초고속 승진으로 촉망받는 동시에 몸과 마음은 병들어가는 남편이 우물을 벗어날 수 있다면, 내가 아니라도 좋았다. 예상하지 못한 나의 반응에 그는 말문을 잃었다. 우리가 얼마나 절실한 지에 대한 깨달음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 그의 퇴사로 이어졌다.


나는 복직을 하고 18개월이 지나 육아휴직에 밀렸던 승진을 했다. 스스로 우물 속에 다시 들어가 고군분투한 나를 남편은 뜨겁게 안아 주었다. 내가 야근을 하고 출장을 다니며 집에 없는 동안, 아이가 아플 때나 안 아플 때나 모든 일을 다 해낸 건 그였다. 공든 탑 같은 커리어를 버리고 성역할 고정관념과 부딪히며 보수적인 사회시선을 견뎌내려고 발버둥 쳤던, 쓰디쓴 한약 같은 그의 18개월을 생각했다. 나를 안아준 그의 어깨는 내 눈물로 젖어들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푸른빛의 샘처럼, 나와 남편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믿음을 서로에게 보내주고 있었다. 티 없이 맑은 아이의 새파란 여름 하늘 같은 사랑을 나눠가지며, 우리는 그 서툴고 굴곡진 순간들을 버텨냈다. 진파랑의 샘물이 커런트 강(Current River)으로 하염없이 흘러가듯, 우리 부부의 투명한 눈물 같은 시간도 착실히 흘러갔다.








우리에게 사진을 찍어주려고 누군가 다가왔다. 가족사진을 찍기 위해 남편이 폰으로 이리저리 구도를 맞출 때였다. 웨딩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던 신부였다. 드레스 치맛자락을 한 아름 안고 있어서 이런 수고로움을 안겨줘도 될지 고민되었다. 햇살보다 눈부신 그녀의 미소는 불가항력이었다.


다정한 눈빛의 신부는 맑은 샘 앞에서 그렇게 우리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사진 속 딸아이는 어제 뺀 앞니의 빈자리가 보일랑 말랑 했다. 그녀를 감싸듯 서있는 나와 남편은 입꼬리가 중력을 거스르며 한껏 미소 지었다. 우리 부부의 결혼 8년의 의미가 이 사진 안에 담겨 있었다.





투명한 푸른 눈물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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