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례 시집 [개천은 용의 홈타운] 중에서
화가가 되고 싶었다. 대학 때는 국문과를 그만두고 미대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 년 내내 그 생각만 하다가 결국 못 갔다. 병아리를 키워을 끓였는데 못 먹겠다고 우는 사촌을 그리려고 했다. 내가 그리려는 그림은 늘 누군가가 이미 그렸다. 짜장면 배달부라는 그림. 바퀴에서 불꽃을 튀기며 오토바이가 달려가고 배달소년의 머리카락이 바람이 나부끼자 짜장면 면발도 덩달아 불타면서 쫓아갔다. 나는 시 같은 걸 한편 써야 한다. 왜냐구? 짜장면 배달부 때문에. 우리는 뭔가를 기다린다. 우리는 서둘러야 하고 곧 가야 하기 때문에. 사촌은 몇 년 전에 죽었다. 심장마비였다. 부르기도 전에 도착할 수는 없다. 전화받고 달려가면 퉁퉁 불어버렸네, 이런 말들을 한다. 우리는 뭔가를 기다리지만 기다릴 수 없다. 짜장면 배달부에 대해서는 결국 못 쓰게 될 것 같다. 부르기 전에 도착할 수도 없고, 부름을 받고 달려가면 이미 늦었다. 나는 서성일 수밖에 없다. 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 (p9)
《느낀 점》
화가와 시인, 국문과와 미대. 사실, 대학과정에서는 전혀 다른 계열에 편성되어 있다. 인문학부와 예술계열.
문자적으로는 두 사이에 간극이 있다 할지라도, 화가와 시인은 다른 재료를 사용했을 뿐 같은 일을 하고 있다. 화가는 마음속에 있는 그림을 육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화폭에 담아내지만, 작가는 마음속에 있는 심상을 시어를 사용하여 독자의 마음의 도화지 위에 그린다.
시의 화자는 자신이 그리려는 그림을 누군가 이미 그렸다고 토로한다. 늘 뒤만 쫒다가 실패하는 인생. 글쓰기에 있어서 정말 공감되는 부분이다. 내가 쓰려고 하던 내용은 알고 보니 꼭 누군가가 이미 썼다. 완벽한 창조는 원래 없는 것인지, 아니면 나의 뻔한 생각은 언젠가 이미 보았던 그 무엇에 대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병아리가 닭이 되었다가 삼계탕이 되어 누군가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울음을 터뜨렸던 사촌도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사촌은 병아리를 불쌍하다고 보았지만, 자신 역시 불쌍한 존재임을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왜냐면 병아리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었던 것처럼, 사촌도 자신의 죽음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배달 소년의 바람에 나부낀 머리카락과 불타며 쫓아가는 짜장면은 우스꽝스러운 한 장의 그림으로 보인다. 풍자다. 최선을 다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불만족이다. 소년의 모습은 현대인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 명령이 떨어지고 일을 수행해도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상사의 꾸지람. 아내의 불만 섞인 잔소리, 사춘기 아이들의 ‘쾅’ 닫는 문소리.... 그는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마치 짜장면을 시킨 손님도, 짜장면집주인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소년처럼. 아무리 달려도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예정된 실패.
완벽히 계산된 완전한 인생은 없다.
약간은 어긋난 듯이, 약간은 부족한 것이 인생이다.
우리는 늘 불완전한 존재였다. 완전히 철든 자식이었던 적도, 신사임당 같이 완벽한 아내였던 적도, 모든 것을 완벽히 제공할 능력이 있는 부모였던 적도 없다. 늘 조금씩 모자랐다. 잘해보고 싶었지만 후회가 넘치는 삶. 그러나 이러한 모자람의 미학이 인생이 아닐까. 요즘 허당끼가 인기다. 허당 옆에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완벽해 보이는 사람 옆에선 나의 실수가 도드라지지만, 남의 실수 앞에선 나의 관대함이 돋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화자는 마지막 행에서 ‘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라고 결론짓는다. 왜 부인했을까? 화가가 되고 싶지만 화가도 못되었고, 짜장면 배달부에 관한 시를 쓰고 싶었지만 결국 못쓰게 될 것 같다고 고백한 걸 보면, 그의 모습은 꼭 배달 소년 같은데 말이다. 부름과 달려감 사이에서 서성이는 화자가 자신은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라고 못 박는 것은 오히려 강한 긍정은 아닐까.
훌륭한 시의 특징은 한 순간 혹은 일상의 모습을 포착하여 진리를 깨닫게 만드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최정례의 이 시는 웃으며 읽다가 ‘내가 잘못 웃었군’ 하고 끝나게 만든다. 그거 웃는 장면 아니였는데...잘못 짚은 민망함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