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 스님의 소식을 들었다. 강원도에 계신다 했다. 선정암에는 더 이상 스님이 안 계시다는 말. 내가 선정암에 갈 일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주인이 없는 암자는 예전의 고요하나 명징하던 빛을 잃을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아니라면 서운할 것 같았다. 스님도 없이 백구들은 어찌 지내나. 옛날 옛적 쟁쟁하던 큰스님들의 법명으로 불리던 스님을 닮아 의젓하고 품위 있던 백구들. 그 맑은 대숲의 계곡물은 어쩌고? 스님이 안 계셔도 바람은 불어오고 불어가겠지. 그 바람에게마저 서운해진다면 또 어쩌나.
스님이 말씀하셨다.
"이번 초파일 때는 법문 때 '선정암 물소리'도 메시지로 소개할까 합니다."
가능한 선정암에도 들르지 않으려 하나 가끔 가셔야만 할 일도 생긴다고. 초파일 지나고 폭염 소식 들은 지도 오래 건 만 여태 안부도 여쭙지 못했다. 올 초파일엔 선정암에도 등이 좀 달렸는지, '선정암 물소리'는 낭독하셨는지, 간만에 돌아오신 스님을 보고 인연 깊은 보살님들이 한참을 스님 옷소매 붙잡고 눈물을 찍어내지는 않으셨는지. '선정암 물소리'는 내가 보내 드린 시였다.
선정암 물소리
들은 적 있나
선정암 물소리
여름이 가는 소리
가을 발자국 소리
그 소리 듣다
선정에 들다
대웅전 부처님 실눈 뜨고
낮게 낮게 무심에 들고
마당의 백구들 가만가만
바람의 숨결 듣는데
들은 적 있나 본 적 있나
선정암 대숲 계곡 물소리
그 맑은 물소리
그 초롱한 소리
스님과의 인연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 내가 상해에 있을 때 이태리에 살고 있던 언니가 이태리의 한국 절 무상암 스님들을 만났다. 한 분은 노스님으로 핀란드 분, 또 한 분은 젊은 스님으로 이태리 스님이었다. 두 분 한국의 송광사에서 출가하신 분들로 형편이 안 되어 한국을 못 가 본 지 오래. 두 분의 소원은 한국에 한번 가 보는 것이었다. 그때가 2006년 무렵이었다.
선정암의 스님께서도 오래전부터 두 분 소식을 궁금해하고 계셨다. 세 분은 같은 은사 스님 아래 출가한 사형사제 지간이었다. 서신이 끊긴 지도 오래였다. 한국을 떠난 두 분의 행방을 알 도리가 없었다. 다른 스님들이 이구동성으로 승복을 벗었을 거라 장담했을 때도 끝까지 기다렸던 분이 선정암 스님이셨다.
오랜 세월을 유럽 사람들에겐 낯선 잿빛 승복을 입고 겨우겨우 버텨오신 남루한 차림의 두 분 스님을 모시고 이듬해 언니가 한국을 다니러 갔다. 송광사에 들러 물어물어 선정암을 찾았을 때 그동안 살아온 두 분 스님 이야기를 듣고 말을 잇지 못하시며 곧 있을 사형사제 스님들의 연중행사에 꼭 모시고 오라 신신당부하셨다던 선정암 스님.
그 모임에 참석한 스님들이 즉석에서 모은 돈이 이백이라 했나. 노스님도 젊은 스님도 깜짝 놀랐다. 그렇게 큰돈을 쥐어본 적이 없어서. 돈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노스님이 하도 걱정을 하셔서 안심시켜 드리느라 꽤나 고생했다고 언니가 나중에 들려주었다.
이태리에 가서 언니와 무상암 스님들을 뵈었던 내가 스님들의 한국 방문에 합류한 것은 이듬해였다. 그때 선정암에 들러 처음으로 스님을 뵈었다. 단정하던 암자만큼이나 고요한 분이었다. 맑고 깊은 우물을 보는 것 같았다. 돌아와 '선정암'을 썼다. 기억하기 위해. 스님도 암자도.
선정암
그날 따라 바람이 몹시 불어와 스님의 정갈한 차방에 보살님 두 분과 나란히 앉아 차를 마셨다 차를 내리시던 스님이 내 옆으로 난 차방의 쪽문을 열려고 애를 쓰는데 바람이 세찬 탓인지 한지를 곱게 바른 문짝의 아귀가 서로 맞지 않은 탓인지 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고 그 풍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보살님 한 분이 슬그머니 내게 몸을 기울이며 하는 말 아마도 우리 스님이 보살님께 좋은 그림을 보여주려고 저러시나 봐요 마침내 문이 열리자 한 폭의 동양화처럼 단아한 마당가 작은 바위 틈새로 어린 잎새 총총 달고 자태도 서늘하던 단풍나무 한 그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