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침대에 누워 글을 쓴다. 아이를 재워놓고 빈 방으로 건너와 조명등의 각도를 낮추었다. 각각 다른 방에서 잠든 남편과 아이의 잠을 깨울까 봐 쿠션을 이리저리 세워도 한사코 새나 가는 불빛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쓴다. 쓰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어서. 살다 보면 그런 때가 온다.
싱가포르에 살 때가 그랬다. 살면서 그렇게 사람을 안 만나고 산 적도 처음이었다. 2년을 말 그대로 은둔자로 살았다. 만날 사람도 없고, 만날 생각도 없었다. 가끔 한국 슈퍼 아줌마와 한국 미용사를 만나 우리말을 하는 게 다였다. 1년은 시험관 아기를 준비했고, 1년은 임신 기간으로 보냈다. 날씨는 더웠다. 무시무시한 습도 때문에 사시사철 에어컨을 켜야 했는데 마지막 1년은 한기로 어렵게 착상한 수정란을 잃은 적이 있어 에어컨도 없이 지냈다. 남편 양복과 구두와 겨울 신발에 차례로 곰팡이가 폈다.
남편이 출근하면 버스를 타고 복합 쇼핑센터로 갔다. 밖으로 나다니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매일 출근하는 현지 카페가 생겼고, 무엇보다 규모가 크고 훌륭한 서점이 있어 즐거웠다. 센토사 섬으로 가는 모노레일을 탈 수 있는 비보시티 Vivo City였다. 식당과 카페는 물론 헬스장과 영화관과 옥상에는 아이들이 야외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공간과 현지인들이 싸게 먹을 수 있는 푸드 코트도 있었다. 서민들이 각자 주머니 사정대로 즐길 수 있는 곳. 거기서 세계 순회공연을 준비하던 마이클 잭슨의 마지막 다큐멘터리 필름 <This is it>을 세 번이나 보았다. 두 번은 혼자서.
하루 두 차례 산책도 일과였다. 아침 7시 이전과 저녁 7시 이후. 집에서 큰 도로를 따라 5분쯤 가면 오른쪽으로 경사길이 나타났다. 언덕 위의 공원이었다. 1시간을 걸어도 다 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저녁이면 남편과 우리 공원에서 출발해서 더 멀리 이어진 공원까지 걸어갔다가 버스로 돌아오기도 했다. 센토사 섬도 남편의 퇴근 후 자주 가던 곳이었다. 보통은 모노레일을 이용했는데 손님이 오면 아찔하면서도 풍광이 훌륭한 케이블 카를 타고 바다 위를 건너가기도 했다. 태풍이 오지 않는다는 센토사의 아담하고 안온한 비치에서 일몰을 보며 마르가리타 피자를 먹었다.
내가 가장 좋아한 시간은 저녁 7시. 언덕 위의 공원에서 바다로 장렬하게 전사하는 일몰을 감상하는 일. 해는 매일 죽고 다음 날 새로 태어났다. 죽어야만 다시 만나는 인연 같았다. 내 자리도 정해져 있었다. 하루 종일 차곡차곡 속을 데운 반듯한 돌이 나를 기다려 주었다. 산책은 2년 동안 계속되었다. 아이를 갖고 첫 석 달 동안 침대에 누워 꼼짝도 안 하던 시간만 빼고. 1년쯤 지나자 울창한 숲과 아름드리나무에서 글들이 쏟아졌다. 산책길을 오르내리며 꽃잎처럼 떨어진 글들을 줍느라 바구니를 들고 갔다. 그렇게 돌아온 저녁이면 오늘처럼 밤새 창문을 열어두고 주워온 글들을 다듬고 정리했다.
깜빡 졸면서 쓰던 글을 저장만 하고 누웠다가 몇 번이나 잠이 깼다. 눈을 뜨면 30분도 지나고 1시간도 지났다. 저장한 글을 브런치에 올려놓고 다음 글을 시작하다가 또 잠이 들었다. 네댓 번을 쓰다 깨다를 반복하니 날이 밝았다. 글이 오는 소리였다. 그렇게 고요히 내 잠을 흔들어 깨우던 소리. 떠난 지 1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아이를 낳고 길렀다. 싱가포르에 살던 그때처럼 언젠가 해질 무렵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귀한 그 소리들을 받아 적으니 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