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터널은 캄캄하지 않아요

추크 슈피체 휠렘탈 클람

by 뮌헨의 마리
테게른제 숲 터널의 끝은 언제나 빛!



오랜만이에요.

긴 시간 외국에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겐 해가 갈수록 친하다고 느끼는 사람 수가 적어진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오십을 지나면 그런 현상이 더욱 뚜렷해지고요. 달리 생각하면 바람직하진 않지만 당연한 일 같기도 해요. 한때 친했던 옛 친구도 오래 못 보다 만나면 서먹할 때가 있잖아요. 몇 년 만에 만나도 어제 헤어진 것 같은 사람도 있지만요.


외국에서 만나는 이들과는 오랜 만남이 지속되는 경우가 드물어요. 현지인 배우자와 결혼해서 뿌리 내리고 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요. 남편의 직장이나 아이의 교육 문제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몇 년 사귀다 헤어지면 다시 만날 가능성도 적지요. 이런 일이 반복되면 사람을 만나는 일에 기대가 없어져요. 사람들이 종교 단체에 나가는 이유가 그런 거 아닐까요. 종교에 의지하려는 마음만큼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은 바람 같은 거요.



추크 슈피체 산의 휠렌탈 클람 계곡(아래)과 동굴 입구 카페(위).



요즘 뮌헨의 불교 모임에서 만난 이들과 뮌헨 근교로 등산을 다녀요. 아직은 멤버가 정해져 있지 않지만 주말이나 공휴일에 누군가 등산을 제안하면 즉석에서 톡으로 의견을 물어보고 시간 맞는 사람들끼리 가는 방식이에요. 꼭 불교인이 아니라도 괜찮고요. 산에까지 가서 종교를 논할 일은 없으니까요. 조용히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설교나 법문보다 나을 때가 있잖아요. 대화의 기본도 거기서 배우고요. '잘' 들어주기 같은 거요.


최근에는 그분들과 독일의 최고봉 추크슈피체 Zugspitze* 산에 다녀왔어요. 정상까지는 못 갔고요. 우리의 목적지는 휠렌탈 클람 Hüllentalklamm**이었거든요. 우리말로 '지옥계곡동굴'이라 할까요. 이름에 걸맞게 조금 힘들었어요. 지옥 앞자락 체험쯤으로 해둘게요. 계곡에는 옥색물이 흐르고 산길을 오르고 오르다 보면 그 끝에 자연동굴이 나와요. 동굴 안은 좁고 어둡고 축축하고 바닥도 울퉁불퉁해서 미끄러지기 쉬워요. 동굴을 지나 계곡에 돗자리를 펴고 일행들과 만찬을 즐기는데 계곡에서 불어오는 칼바람과 갑자기 비바람을 몰고 온 험한 날씨에 만찬 산정까지 오르는 건 포기하고 다시 자리를 접고 동굴 지나 아래로 내려왔답니다.


동굴 입구의 작고 예쁜 카페테라스에서 뜨거운 차와 달콤한 독일식 디저트 카이저 슈만을 나눠먹은 것도 기억에 남네요. 마치 한국의 계곡에 소풍을 다녀온 기분이었어요. 이분들과 오래 산에 다닐 수 있을까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아참, 동굴 입구에 오를 때 나이가 비슷하고 말이 잘 통해서 쉽게 친해진 M이란 친구와 <한계령>을 부른 순간도 기억하고 싶네요. 화음이 잘 맞았거든요. 아시죠, 그 노래. 맞아요. 딱 그런 산, 그런 계곡이었어요. 떠날 내려가라 내려가라며 등 떠밀던 손길도 그렇고요. 바람이 계곡 아래까지 따라와 준 것도요.



저 그늘이 나무 한 그루가 만든 크기다.



오늘도 테게른제 산 노이로이트 Neureuth로 등산을 다녀왔어요. 두 번째로 나 홀로 간 등산이었어요. '혼산'에는 아주 특별한 게 있더군요. 물소리 바람 소리에도 다양한 서사가 있단 걸 알았고요. 산 밑에서는 바람이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와 합쳐져 파도 소리로 들렸는데 내려올 땐 고요와 침묵이 할이었어요. 바람이 전하는 말과 나무가 전하는 말도 궁금하죠? 이런 걸 물어요. 뭐가 궁금하냐. 뭐가 알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냐. 철학관처럼요. 예상 질문 중 하나였는데 궁금한 건 없었어요. 나뭇가지가 아래로 휘어진 나무 곁을 지날 때 옛 생각이 난 건 예상 밖이었고요. 남들처럼 평범하고 건강하던 시절 말이에요. 타인에게 그늘이 되어주고 싶은 때도 있었는데 어림없는 바람이었단 걸 이제야 알겠어요. 돌아보니 나 자신을 위한 한 줌 그늘도 못 만들고 산 거 같아요.


혼자 등산을 땐 가끔 혼잣말을 해요. <노인과 바다>의 노인처럼요. 노인처럼 사무치게 그리운 두고 온 소년은 없지만요. 노인은 망망대해에서도 길을 잃지 않지만 산길을 오를 두 갈래 길 앞에서도 헷갈릴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어느 쪽이 답일까요. 넓은 길. 그래도 헷갈린다면. 한번 오른쪽으로 꺾으면 다음엔 왼쪽이겠죠. 경사길을 오를 겨우 10~15도의 경사가 30~45도의 심리적 경사로 바뀔 때가 있어요. 그럴 땐 호흡부터 골라야죠. 죽으란 법은 없잖아, 허세도 살짝 부리면서요. 인생은 경사길만 있는 아닐 테니까요. 그리고 한 발 또 한 발. 촘촘한 숲을 뚫고 들어온 햇살에 반짝이는 초록잎이 반갑다며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보일 때도 있어요.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을 때는 어떡할까요. 끝인가 했는데 아닐 말이에요. 그럴 땐 이렇게 생각해요. 안 보인다고 끝이 없는 건 아니다. 보인다고 끝도 아니고. 끝까지 가야 끝이라는 걸 산에서 배우고 돌아옵니다.



여우야 여우야.. 어린 왕자는 오늘도 널 기다리게 하는지. 그래도 넌 행복한지.



산길을 1/3쯤 오르면 여우 사진도 있어요. 사진을 보면 어딘가 잠자는 여우가 있을 것만 같아요. 졸면서도 어린 왕자를 기다리는 여우 말이에요. 한국의 소나무와 달리 쭉쭉 뻗은 소나무 숲 벤치에 앉아 여우와 어린 왕자를 생각합니다. 둘이라서 외롭지는 않을 거예요. 산을 오를 때면 밑동이 잘린 나무들도 만나요. 그 밑동에서 어린 가지들이 자라나는 모습도 보고요. 잘려나간 밑동을 푸른 이끼가 감싸고 있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땐 이런 생각이 들죠. 언젠가는 우리도 흙으로 돌아가겠구나. 그렇겠지. 혼자 묻고 혼자 답하면서 마음이 편해지지요. 그 마음 사이로 새와 적막이 들고 날고 하네요. 제 마음이 허공인 줄 아나 봐요. 이걸 배우러 왔는지도 모르겠어요. 언젠가는 죽는다. 모두 죽는다. 흙으로 돌아간다.


뮌헨에서 첫 등산을 간 사월 중순부터 지금까지 두 달 동안 총 10회 등산을 갔어요. 한국 분들과 네 번. 독일 시니어 그룹과 두 번. 가족 등산 두 번. 그리고 나 홀로 두 번.. (옆에서 듣던 남편이 왜 자기랑 한 번 간 건 빼먹냐고 하네요. 오호라, 그렇다면 총 11회!) 그중 일곱 번을 이곳 테게른제로 왔네요. 가족들과 다시 이곳에 왔을 때는 어찌나 마음이 즐거운지 멀찍이서 남편과 아이 뒤를 쫓아가면서도 신이 나서 속으로 외치기를 몇 번. '다 나을 것 같아! 다 나을 거야! 다 나았어!' 산에 가면 정말 그런 기분이 들어요. 언젠가 누가 그런 말을 어요. 이젠 그 터널에서 나올 때가 되지 않았냐고요.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고요.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네요. 그때는 자꾸 있다 보니 터널도 적응이 된다고 답했는데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어요. 마음은 벌써 밖인데 몸이 조금 머물러 있는 거라고요. 이젠 다르게 말할게요. 테게른제에 가면 산 초입에 울창한 숲 터널이 있는데요. 여길 지날 때마다 제 귀에 이런 들려와요.


나의 터널은 캄캄하지 않아요.

날 걱정해주는 당신 덕분에요.


산에 가면 나를 위해 산이 불러주는 노래가 있는데 들어볼래요. 그대여/아무 걱정하지 말아요/우리 함께 노래합시다/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그런 의미가 있죠/떠난 이에게 노래하세요/후회 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나도 그렇게 노래하며 살려고 해요. 터널 안에서나 밖에서나요. 산 위에서나 산 밑에서나요. 그때 그 시절처럼요. 건강하세요. 산처럼 바다처럼 도 잘 있을게요.



테게른제 전경.


*추크슈피체 Zugspitze 산:

독일의 최고봉. 높이는 2,962m로 알프스 산맥의 일부다. 독일의 바이에른주와 오스트리아 티롤주 사이에 위치한다. 여름에도 만년설을 볼 수 있다.

(기차 편)-49유로 티켓-

뮌헨-가미쉬 파르텐키르헤 Garmisch-partenkirche

(07:32-08:56)



**휠렌탈 클람 Hüllentalklamm(지옥계곡동굴):

자연동굴 입장료:성인 6€/청소년 2€/어린이 1€

(기차 편)-49유로 티켓-

가미쉬 파르텐키르헤-함머스바흐 Hammersbach

(09:14-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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