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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Nov 12. 2023

눈처럼 흰 죽을 끓였다

항암 사흘 죽단식

흰죽에 간장과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어도 먹고, 심심한 된장국도 부어먹었다.



먹방을 싫어했다. 뭘 저런 걸 다 하고 저런 걸 또 보나 싶었다. 런 방법으로 돈을 벌어야 하는가 싶기도 했다. 그 젊은 나이에 위와 몸을 혹사하며 마지막엔 망칠 걸 뻔히 알면서. 그걸 먹는 사람도 그렇지만 보는 사람들의 심리도 이해되지 않았다. 먹고 싶으면 가서  먹으면 되지, 왜 남이 먹는 걸 보나 이해가 안 됐다. 그러던 내가 항암 1주 차를 끝내고 2주 차를 기다리며 매일 유튜브로 음식 레시피를 검색하다 먹방에 꽂힌 지 이틀 째다.


남편이 말했다. 왜 음식 유튜브만 계속 보냐고. 글쎄다. 대답이 궁했다. 나도 내가 왜 그러는지 몰라서. 산책도 안 나가고 뒹굴거리며 먹방만 보고 있는 환자의 심리가 남편은 진심 궁금한 것 같았다. 그래도 그럴 때가 있잖은가. 마음껏 게으름을 부리고 싶은 때가. 그날 내가 그랬다. 이러다 위가 안 좋아져서 항암 내내 음식을 제대로 못 먹는 건 아닌가 하고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불안했다가 한인 식당에 가서 맛있는 외식을 하고 돌아오자 안도감 때문인지 그날 밤엔 잠 잘 잤다. 다음날도 점심때까지 쉬고, 초간단 미역국을 끓여 가족들과 점심을 먹고 또 쉬었다.


먹방은 주로 젊은 여자 유튜버들이 하는 채널을 보았다. 예외 없이 몸은 마르고 먹는 모습조차 예쁜 유튜버들이었다. 그중에는 구독자 천만을 향해 가는 유튜버도 두 명이나 있었다. 놀라웠다. 그 몸으로 10인분은 될 것 같은 어마어마한 양을 해치우다니. 자꾸 보니 내가 마치 그녀들과 함께 먹는 기분이었다. 대리 만족이랄까. 그들이 먹는 모습만 봐도 마지막엔 내 배가 불렀다. 따라먹고 싶은 건 기본. 매운 음식을 먹을 땐 내 혀도 불 붙는 것 같아 안쓰러다. 자꾸 보다 보니 그녀들을 동정하거나 비난하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들도 자신들이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럼에불구하고 여전히 지나치게 많은 양에 도전하는 대식가 버전보다는 적당히 많은 양의 음식을 맛있게 잘 먹는 모습이 기도 좋고 마음도 편다.



한국슈퍼에서 보내 주신 호박과 한국 배(위). 저 귀한 배로 물김치부터 담아야 할텐데. 심심한 미역국과 된장국(아래).



항암 2주 차를 기다리며 다시 식이를 고민다. 어떻게 가야 위도 보호하고 <항암사흘단식>도 잘할 수 있을까. 무조건 부딪히며 나만의 방식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 한글학교가 끝나고 아이가 전화를 해서 한국슈퍼에 뭐라도 사갈까 물어서 두부 2모를 부탁했는데 뭔가를 무겁게 가방에 짊어지고 왔다. 한국슈퍼 사장님과 J언니가 필요한 거 없냐고 전화를 주셔서 괜찮다고 했는데도 바리바리 싸주신 것이었다. 아이가 말했다. 미안해서 죽을 뻔했다고. 자기는 다시는 못 간다고. 내가 좋아하는 호박죽과 호박 한 덩이, 한국 배 하나, 사장님이 직접 담그신 김치, 무 말랭이, J 언니가 싸주신 불고기 재료.. 아이의 심정이 백 번 이해되고도 남았다. 감사하게 먹고 항암을 잘하는 게 유일한 보은이겠다.


죽은 매일 끓기로 했다. 한꺼번에 많이 끓놓으니 쉽게 질렸다. 국이나 찌개도 그랬다. 조금씩 끓여야 신선하고 다양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죽과 국 끓 냄비 사이즈를 확 줄였다. 양을 생각해서 집에 있는 콩을 불리고 갈아서 콩죽도 만들어 먹  몇 가지 공정 때문에 될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나. 지난번 집 앞에서 만 언니는 쌀을 불리고 갈아서 죽을 끓이면 고소하다는 팁을 알려주셨다. 알찬 정보는 차고 넘치니 결국은 실천에 달렸다. 니즘을 극복하고 부지런으로 승부를 걸어야 할 텐데. 


<항암사흘단식> 첫날은 흰 죽. 다른 이유는 없고 집에 흰 밥이 한 공기 남아 있어서. 항암 첫 주를 지나 보니 무염식은 안 되겠다는 결론을 얻었다. 사흘 후 일반식으로 돌아올 때 위에 자극이 컸다. 그래서 결론은 저염식. 그래야 입맛을 잃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 미역국은 전날 다 먹어서 배추 된장국을 심심하게 끓였다. 흰 죽에는 간장 소량, 참기름 조금 붓고 비벼 먹기도 하고, 된장국을 조금 부어 먹었더니 먹기가 좋았다. 배추 된장국을 끓이려고 배추 속과 무를 자르다가 둘 다 생으로도 먹어봤는데 맛있었다. 배추 된장국이 의외로 질리지 않을 테마 같기도 하다. 항암사흘단식 때는 황태 뭇국을 끓이고, 사흘 죽 단식이 끝나고 나면 소고기 뭇국을 끓일 생각이다. 첫 주 보식의 실패를 거울삼아 두 번째 주를 준비 중이다. 2시간의 1만 보 산책도 다녀왔고 죽도 먹었으니 먹방이냐 요리 유튜브냐만 남 홀가분한 일요일 오후다.



발코니 뒤쪽의 이웃집 나무도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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