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예의

그룬트슐레 3학년

by 뮌헨의 마리


"그동안 니 마음 많이 힘들었겠구나."



드디어 알리시아가 3학년이 되었다. 독일의 초등학교는 4년제. 3, 4학년이면 벌써 고학년이다. 내년이면 대학 진학을 위해 김나지움이냐 직업학교냐 결정도 해야 해서 엄마 아빠들의 고민도 함께 깊어질 예정이다. 지난주 금요일 저녁에는 같은 반 율리아나 엄마 이사벨라가 잠시 우리 집에 들러 이야기를 나눴다. 금요일은 방과 후 수업이 없어서 율리아나가 오후 내내 우리 집에 와서 놀았다. 저녁 7시에 아이를 데리러 온 이사벨라가 말했다.

"이건 빨라도 너무 빨라. 초등 4년짜리가 뭘 알겠냐구."

여기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자기도 그래서 망한 케이스란다. 김나지움을 진학하면 어학이나 수학을 선택하는 모양이다. 우리의 인문계 자연계 구분 같은 거겠지. 이사벨라는 자기가 어학에 재능이 있는 줄 알고 어학 쪽을 선택했다가 라틴어 벽을 못 넘어서 김나지움 졸업도 못했단다. 그래서 도중에 직업학교로 넘어갔다나. 자기가 라틴어에 맺힌 게 얼마나 많은지 잠시 피력하던 이사벨라. 웃을 상황은 분명 아닌데 둘이서 한참을 파안대소했다.

이사벨라는 우리 동네에 산다. 얼마 전에 장미정원에 같이 갔던 헝가리 할머니가 이사벨라의 친엄마다. 남편은 태국 사람인데 연하라고, 처음 만난 날 어깨를 으쓱하며 내게 말했다. 태국을 여행하다 만났다고. 이사벨라도 나도 둘 다 외국인인 데다, 동양인 커플에, 아이들 외모마저 아시아계라 서로 편했다. 이사벨라의 털털한 성격도 한 몫했다. 반 아이들 중 유일하게 같은 동네에 살고 있으니 만날 기회도 많았다. 우리 남편까지 셋이서 학부모 저녁 모임에 갈지 말 지 새로 도입되는 체육 방과 후 수업을 신청할지 말 지 얘기꽃을 피우다가 알바 엄마 이네스 얘기가 나왔다. 방학 직전에 나와 관계가 냉랭해진 엄마다. 남편의 마음속에 그 일이 계속 걸려 있었나 보다. 와인 한 잔을 마신 남편이 불쑥 그 얘기를 꺼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나는 괜히 미안했다. 그 일로 남편이 걱정을 많이 했구나. 또 놀란 건 이사벨라의 반응이었다. 아무 말 없이 나를 안더니 조용히 말했다.

"그동안 니 마음이 많이 힘들었겠구나."

시간이 흐르고 생각해 보니 내가 잘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가시 돋친 이메일을 보낼 필요가 없었다. 화가 난 상태에서 저지르는 모든 말과 행동은 후회를 남긴다는 것을 값비싸게 배운 셈이었다. 그 일이 다시 화제에 오르는 것이 나로서 반갑지 않은 이유였다. 부끄러웠기 때문에. 그럼에도 이사벨라의 말 한마디는 충분히 고마웠다. 이사벨라가 말했다. 자기 남편도 여러 가지 일을 겪는다고. 이네스와 충돌한 건 내 실수였다. 명백한 잘못을 해 놓고도 자존심 때문에 그녀와 불편한 관계를 자초한 것도 나였다. 이네스로서는 당연히 내 반응에 기분 나빴겠지. 타인과 충돌한다는 것은 엄청난 감정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었다. 안 맞으면 자주 안 보면 된다. 일부러 얼굴까지 붉히며 돌아설 필요야 있나.




개학 첫날 아침 학교에서 이네스를 봤다. 사실 아침에 학교 가기 전부터 신경이 쓰였다. 만나면 반갑게 인사라도 해야지 마음을 먹고 학교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학교 입구에서 이네스와 딱 부딪혔다. 안 마주쳐도 좋을 텐데 이런 사이는 꼭 만나게 된다. '할로, 이네스!'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다행히 그녀도 외면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함께 웃어주지도 않았지만. 그걸로 다행이다 싶었다. 내가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더라면 알리시아를 교실로 보내 놓고 학교 앞에 서 있던 그녀에게 다가가 방학은 어떻게 보냈는지, 여행은 어디로 다녀왔는지, 말을 걸어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앞으로 그녀와 만날 일이 많지 않을 거라는 명백한 사실에 안도하며 돌아섰다. 시간이 지나면 그녀도 마음이 누그러질 때가 오겠지. 그건 그녀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카페 이탈리에 도착하자 새로 출근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이와 함께 나 역시 새 학기를 시작하는 느낌이 좋았다. 아이가 방과 후 수업까지 하니 내 앞에 주어진 긴 하루가 선물처럼 느껴졌다. 옆 테이블에는 독일 할아버지 한 분과 맞은편에는 할머니 두 분이 나란히 앉아 각자의 폰을 열심히 들여다보시며 무언가를 골똘히 연구하는 중이었다. 뭘 그리 연구하시나 궁금해서 잠시 귀를 기울였더니 '여기 와이 파이는 도대체 어떻게 연결하나' 하는 거였다. 그 연세에 얼마나 어려운 과제일지 짐작이 갔다. 게다가 나는 그 카페를 꽉 잡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할머니들께 말을 걸고 차근차근 한 분씩 도와드렸다. 두 분이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나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남과 부딪히지 않고 살아가는 기술도 중요하다. 특히 외국살이를 하는 입장에서는 현지인들과 부딪혀서 좋을 게 뭔가. 괜히 주눅만 들고 자신감이 떨어지기 십상이다. 무엇보다 좋은 낯으로 살아가는 즐거움, 그걸 잊어서는 안 되겠지. 미안한 일은 미안하다 말하고 쿨하게 털어버리면 될 텐데 그게 왜 그리 어려웠을까. 이럴 때 또 우리 속담이 떠오른다. 매도 진작 맞는 게 낫다. 이 속담은 살면 살수록 나이가 들면 들수록 새록새록 새롭다. 참 신기하다. 겪을 일은 빨리 겪고 두 번째 화살만 피하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매 순간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게 된다.

일요일인 오늘 오전에 아이는 고모와 자전거 연습을 갔다가 먹지 못하는 밤을 잔뜩 주워왔다. 고모 말에 의하면 자전거는 조금 타고 밤 줍는 재미에 시간을 다 보냈다나. 저런 것조차 시간이 지나면 좋은 추억이 되겠지. 오후엔 아이와 파파가 2주 마다 상영되는 해리포터 시리즈 4번째 영화를 보러 간 사이 나는 친구를 만나 불교 모임에 다녀왔다. 추석 전이라고 맛있는 음식까지 먹었다. 배도 부르고 날씨도 선선해서 친구도 나도 걷고 싶어졌다. 시내에서 우리 집까지 걸어오는 동안 어둠이 발 아래까지 따라 걸어왔다. 집에 도착하자 윗집 오스카 엄마 안이 작은 케이크를 구워서 들고 왔다. 화초들이 어쩌면 그렇게 잘 자랐냐고. 인간에 대한 예의는 뭔가, 생각하게 되는 주말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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