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글*을 읽다가 위 문구에서 눈과 마음이 동시에 멈추었다.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카사노바의 귀향>이 생각 나서다. 이 책이 카사노바의 한창 때를 다루었다면 그토록 내 관심을 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 사정이야 눈 감고도 뻔한 일. 카사노바가 그냥 카사노바겠는가. 그의 화려한 연애 편력이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다면 도리어 실망할 일이다. 누구나 자기다울 권리가 있다면 카사노바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겠다.세상만사 뜻대로 되지 않는 건 세간의 사정만은 아니다. 천하의 카사노바 역시 마찬가지.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다.
중년의 카사노바를 보라. 나이 앞에 장사 없다. 그의 마지막 열정은 안쓰럽고도 애처롭다. 기운도 떨어지고 자신감도 약해지는 중년의 애수가 이보다 명백히 드러나기도 어렵겠다. 잘 나가던 시절과의 낙차가 커서 좌절감이 더 클 수도 있겠지. 바래져가는 카사노바의 명성은 젊음 앞에서 무력하고 무색해진다. 그의 이름조차 모를 뿐만 아니라 그의 매혹적이고 탐욕적인 눈길에 눈도 깜짝 않음으로써 카사노바의 애를 태우는 매력적인 아가씨 마르콜리나 앞에서. 드디어 도착한 베네치아에서 예전에는 대단히 인기 있었던 베네치아에서의 모험적인 탈옥 이야기에 일말의 관심도 없는 젊은이들 앞에서.
다시 감옥을 탈출할 때 그가 던진 일갈로 돌아가 보자. '당신이 나를 이유 없이 가두었으니, 나도 이유 없이 떠난다.' 이것이 카사노바다. 카사노바의 감옥은 비단 그의 몸을 가두던 그 감옥만은 아니리. 그의 전 생애를 압축해놓은 듯한 저 멋진 언어 유희 때문에라도 카사노바는 사랑받기 충분하다.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 사랑 받아야 마땅하다. 몸도 마음도 감정도 정신도 가두면 탈이 난다. 갇히는 순간 숨이 막힌다. 어떤 식으로든 탈출을 꿈꾸게 마련이다. 각자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 카사노바를 만날 때 명심할 일이다. 꼭 내 사람이 되어야만 좋은 건 아닐 지도.
번역자의 해설을 참고하자면 이 노벨레는 쉰세 살의 카사노바가 고향 베네치아로의 귀환을 눈앞에 두고 만토바 근교의 영지에서 보내는 2박 3일, 베네치아로 돌아가는 이틀 밤낮의 여정, 베네치아에서 맞이하는 첫날을 그리고 있다. 슈니츨러는 이 작품에서 노년에 들어선 카사노바의 정체성 상실에 초첨을 맞춰 집중적으로 다룬다. 카사노바를 통해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상심을 다각도로 표현하고 심리학적으로 성찰하는 작품이다.
아, 카사노바여! 무정한 세월이여!
누구에게나 그런 기억이 있겠지. 당신이 나를 이유 없이 사랑하고 이유 없이 미워하고 이유 없이 떠나고 이유 없이 붙잡고 이유 없이 그리워하다 이유 없이 잊기도 하는 그 숱한 '당신이 나를'로 인생의 절반이 술잔처럼 채워지고 찻잔처럼 비워지던기억들이. 혼자서 말없이 좋아하고 대놓고 팬심으로 좋아했던 시간들이 나에게도 있었다. 20대에서 40대까지 그것도 파노라마처럼. 사람을 좋아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고 우긴다면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는 한 우린 모두 능력자.
매사에그렇게 살 일이다. 친구도 사랑하고 스승도 존경하고 숱한 사람들을 변함없이 좋아하고 힘껏 사랑하며 살아보는 일. 그런 인생이라야 후회가 없겠다. 뭐든 자꾸 해봐야 는다. 독서도 글쓰기도 심지어 연애도. 사랑하는 일도 사랑받는 일까지도그렇다. 독일로 온 후 깨닫는다. 그랬구나. 그 시절 당신들은 이유도 없이 외면도 하고 기다리기도 했구나. 누구나 그런 대상이 하나쯤 있어 살아지는 때가 있겠지. 아무려나 그렇게라도 버티야 한다면 뾰족한 수가 없다. 모쪼록 견뎌보는 수밖에. 살아 있어야 언젠가 다시 만날 날도 있으니.
뮌헨은 지금 대책 없는 축제의 분위기다. 성큼 다가와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가을이 온통 옥토버 페스트로 물들고 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녀의 인생은 던들 Dirndl과 함께'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남독일의 마지막 굿바이 썸머 행사격인 옥토버 페스트와 여자들의 매혹적인 드레스 던들의 시간이 맥주 속에서 경연을 벌이는 것이다. 자꾸만 눈이 가는 던들의 자태 속에서 이유도 없이 젊은 날 혹은 바로 지금 당신이 기다렸고 아직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의 '그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헤아리기 좋은 시간이다. 그리하여 이 가을 뮌헨은 바이스비어 Weissbier의 호박빛 추억으로 가득하고 아득해질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