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시예비치가 노벨상을 타던 날을 기억한다. 2015년 10월이었다. 그날 저녁에 나는 언니와 남산 도서관에서 문학 강의를 들었다. 강의 휴식 시간에 노벨상 문학 소식이 전해졌다. 처음 듣는 작가였는데, 벨라루스 출신이라는 말에 무조건 반가움이 앞섰다. 서울에 살던 벨라루스 친구 이나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두 남편들이 친해서 자연스럽게 아내인 이나와 나도 친구가 되었다. 부부가 언제 봐도 겸손하고 온화하고 젊잖았다. 이나의 답이 왔다. 순문학이 아니라서 좀 그래. 내가 말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자부심을 가져. 너희 나라가 노벨상을 탄 거야. 그것도 노벨 문학상을! 정말 축하해.
강의가 끝나고 계단을 내려오자 아는 얼굴들이 도서관 앞마당에 모여있었다. 평소라면 귀가하느라 각자 바쁠 시간이었다. 노벨 문학상 발표를 함께 들었다는 흥분이 모두의 발길을 붙잡은 것 같았다.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간간이 웃음이 터질 때마다 고요하던 밤공기가 물결처럼 출렁거리던 기억이 난다. 다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순간도. 달빛이 무척이나 밝았다. 가을이었다. 춥지는 않았다. 돌아보면 찰나였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달빛이 말을 대신하던 밤. 불현듯 마음이 충만해졌다. 말이 없어서 더 좋은 때도 있는 것이다.
그 해의 마지막 날 밤에는 이나 부부 집에서 송년회를 했다. 어찌나 음식을 많이 준비했는지 먹다가 지칠 정도였다. 새해 카운터 다운은샴페인과함께였다. 늦게 재혼한 이나네도 같이 갔던 우리 언니네도 아이가 없어 아이라고는 우리 아이 하나였다. 아이를 위한 선물은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아이를 위한다는 핑계로다 함께 <라따투이>도 보았다. 애보다 어른들이 더 좋아했다. 자정을 넘기고 돌아가는 우리 자매에게 이나가 준비한 선물도 알렉시예비치의 책이었다. 한국어로 번역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내밀 때 이나의 눈가가 잠시 젖는 것도 보았다. 벨라루스의 독재 정권이 그해 선거에서 또 이겨 그들 부부의 한국살이가 길어질 듯한 예감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 후 알렉시예비치의 책 다섯 권이 차례로 출간되었고, 그때마다 사 놓기만 하고 바로 읽지는 않았다. 책 표지만 봐도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내용은 또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지레 겁도 났다. 알렉시예비치의 책을 읽은 건 2년 후였다. 독일로 가기로 결정한 때였다. 그해 노벨 문학상은 이시구로가 받았다. 왜 하루키가 아니고 이시구로인가. 연말에 이시구로의 작품 강의를 신청했다. 납득이 갔다. 그럼 왜 하루키가 아니고 알렉시예비치였을까. 하루키의 팬은 아니지만 궁금해졌다. 한 권을 읽고 알렉시예비치의 손을 들어준 한림원의 양손과 열 손가락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내가 만난 건 참혹한 전쟁이 아니라 전쟁 속에서도 빛나던 사람들이었다. 순결한 마음이었다. 다섯 권 중 네 권을 읽고 독일로 건너왔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읽지 못한 책이 <마지막 목격자들>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4년 간의 전쟁 동안 부모를 잃고 중년이 된 아이들의 증언을 담은 책이었다. 내 아이가 아직 한국 나이로 여덟 살 때였다. 책을 펼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뮌헨의 문학모임에서 같이 읽기였다. 다가올 11월과 12월에 알렉시예비치를 읽기로 했다. 책장을 펼치고 끝까지 읽는 데는 이틀도 걸리지 않았다. 어떤 철학도, 어떤 종교도 이 책보다 더 빨리 나를 일으켜 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무슨 일로 눈물을 흘릴 것이며 어떤 핑계로 징징댈 것인가. 이 아이들 앞에서. 하루아침에 천국에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진 아이들 앞에서. 평생을 엄마와 아빠를 잃은 채 고아로 살아가야 하고 그렇게 살아온 아이들 앞에서. 그럼에도 인간이 왜 이토록 고귀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 지를 보여준 이 책 앞에서.
사는 게 시시한가. 무기력한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의욕이 사라졌는가. 이 책을 보라! 내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