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가 아니었을까. 처음 플라토노프 강의를 듣던 날이. 아니면 저녁 무렵만 서늘해지던 늦봄이었나. 아무렴 어떤가. 내 마음 속의 플라토노프는 늦가을이다. 반드시 늦가을이어야 한다. 이토록 쓸쓸하면서도 다정한 사랑을 봄날의 무자비한 햇살 아래 방치해서는 안 되겠기에. 강의를 들으러 바쁘게 오가던 도서관 앞의 계단들. 계단 옆으로 양팔을 길게 늘여 서로의 허리를 꼭 붙들고 서 있던 키 큰 나무들. 계단 위아래로 대책 없이 흩날리던 낙엽들. 목까지 단추를 꼭꼭 채웠나 확인하느라 바쁘게 오르내리던 손길. 머리칼 사이를 옷깃을 사정없이 파고들던 차가운 바람.
전쟁이 끝났다. 풀들은 내전 기간 동안 다져진 황톳길을 따라 다시 자라나기 시작했다. 마을들도 다시 조용하고 한적해졌다... 포투탄 강 위로 멀리 퍼져 있는 언덕을 따라, 적군 병사였던 니키타 피르소프가 걸어가고 있었다.
단편 <포투단 강>의 첫 구절을 읽을 때마다 생각한다. 처음 플라토노프와 대면하던 순간을. '마을'을 자꾸만 '마음'으로 바꿔읽는 습관도 계속되었다.플라토노프의 글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간직하고 있는 사랑의 모습. 그런 마음을 오래 잊고 살았다. 어느 책에서고 영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사람의 마음 속에 깃들지 않은 사랑의 그림자를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지 오래인 모닥불 같은 사랑. 마음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 버려 좀처럼 만나기 힘든 고요한 그 풍경을 포투단 강가에서 다시 조우한다. 예를 들면 이와 같은 모습 말이다.
류바는 창가에서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책을 읽고 있었다. 그 사이 니키타는 어두워질 때를 기다리며, 류바 곁에서 말없이 앉아 있었다... 니키타는 현관에서 장작 부스러기를 가져와, 공부하는 데 필요한 빛을 내기 위해 난로에 불을 지폈다. 그는 열은 적게 나더라도 빛이 많이 나도록 애썼다.
남자는 나무가 제대로 타고 있는지 지켜보다 가끔 여자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의 기억 속에서 보석과도 같은 존재였던 그녀의 얼굴을 그것도 아주 어쩌다 가끔씩만. 여자가 자신의 시선을 싫증낼까 두려워서.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남자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된다는 것이 아쉽다. 여자의 집에서 남자가 보통 하는 일은 이렇게 난로에 불을 때고 그녀가 공부를 하다 잠시 주의를 돌려 그에게 말을 걸 때를 기다리는 것이 다였다. 중요한 건 그럼에도 그가 행복했다는 것. 여자를 도와주기 위해 그녀의 집을 찾을 때마다 남자는 그 보답으로 마음의 행복을 얻고 돌아왔다.
전쟁터에서 3년을 보내고 돌아온 남자는 언젠가 아버지를 따라 손님으로 두 번 방문했던, 초록색 덧창이 달린 집을 지나치며 여자를 생각했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한 목소리에 남자의 가슴은 뜨겁게 달아오른다. 마치 잃어버렸던 소중한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 같았기에. 남자가 다가가자 그녀는 신비로운 영혼이 깃든 깨끗한 두 눈으로, 남자를 사랑한다는 듯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남자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자를 다시 만난 것이 남자는 기뻤다.
이 남자의 사랑법을 보라. 여자가 자기를 그리워하도록 일부러 하루나 이틀을 거르는 날이면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참지 못해 도시를 몇 바퀴씩 걸었다. 흰 빵 두 개를 가지고 돌아온 어느 날은 빵을 하나씩 종이에 싸서 여자의 집 문 옆 벤치에 앉아 흰 빵이 식지 않도록 가슴에 품고 여자를 기다렸다. 따뜻한 날씨가 지속돼 모두들 흡족해했던 그해 가을엔 여자에게 주려고 자신의 군용 외투를 여성 외투로 수선해 놓고 날이 추워지기를 기다렸다. 남자는 그런 행복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도 그는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오랜 기다림과 가난하고 배운 것도 없고 제대한 군인인 자신이 의학 공부를 마쳐야 하는 시립학교 교사 출신의 딸인 그녀에게 정작 필요한 존재인가를 생각하다 그 불확실함 때문에 그의 가슴은 종종 떨렸다. 어느 날은 집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여자에게 잘 자라고 이불을 덮어주던 남자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여자는 그의 머리만 쓰다듬어 주었다. 집으로 돌아간 남자는 다시는 여자의 집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책도 읽고, 이젠 좀 의미 있게 살아야지. 류바는 잊어버릴 거야. 다시는 기억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을 거야. 류바가 뭐가 특별해? 이 세상엔 수백만 명의 위대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류바보다 나은 사람도 많지. 게다가 예쁘지도 않은데!'
다음날 아침, 마룻바닥에 깔아둔 요에서 잠을 자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저녁 무렵 그는 의식을 잃었다. 그로부터 나흘 후 여자는 수소문 끝에 남자의 집을 찾아내 그를 찾아와 마차에 태워 자기 집으로 출발했다. 오한으로 떨고 있는 남자를 여자가 바짝 껴안았을 때 남자는 그 여자, 즉 다른 생명과 몸을 맞대고 싶어서라도 지금 죽는다는 것이 아쉬웠다. 여자가 남자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쥐고 말했다. 곧 나을 거라고. 사람들이 죽는 건 혼자서 아프기 때문이라고.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하지만 지금 당신 곁에는 내가 있다고.
그래서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둘은 행복했을까? 행복은 생각만큼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오래 걸렸고 에둘러 왔다. 남자의 말대로 마치 대단하고 값진 물건을 남몰래 숨겨두고 있는 느낌이었다. 왠지 부끄러워져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몰랐다. 사랑을 너무 오래 참아도 그런 것이다. 남자는 왜 집을 나갔고, 여자는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뎠으며, 두 사람이 다시 만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여기서 다 말하지는 않겠다. 다만 이 문장 하나만은 전해야겠다.
전쟁이야 언젠가 끝나지만, 삶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미리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법이다.
플라토노프가 <포투단 강>에서 보여준 소박한 사랑 만큼은 아니라 해도 이 세상에 사랑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져야 하고 또 그 행진이 끝나서는 안 되는 이유다. 더불어 플라토노프의 대표작인 <귀향>에서 캐내온 사랑에 대한 정의도 함께 옮겨놓는다.
모든 사랑은 무언가에 대한 필요와 외로움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런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고 외로워하지도 않는다면 결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