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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Oct 15. 2018

마흔 살 고백과 생의 비밀

누군지는 밝히지 말자


"사람들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 그다음으로 나와 가족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단 걸 느껴요."


어느 브런치 작가*가 쓴 조지 오웰의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한 글을 읽다가 파안대소한 문장. 물론 조지 오웰의 말을 인용한 대목이다.


"작가란 허영심 가득한 자기중심적 인간. 글을 씀으로써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자기 인정 욕구를 인정받으려는 무뢰한."


내가 좋아하는 마흔 살 친구의 톡을 받았다. 개인적인 대화를 양해도 없이 브런치에 올리는 건 필요할 때면 아무 얘기나 가져다 쓰며 작가 행세를 하는 나의 허세를 그녀가 이해해 주리라는 견고한 믿음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의 고민이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 마흔 살이 된 여성이라면 누구나 사유해 볼 만한 보편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깊이 있는 질문은 넓게 공유될 가치가 있다. 보석 같은 질문을 발견하기 힘든 요즘 같은 때일수록 더더욱. 편의상 그녀의 말을 <마흔 살 고백>이라는 타이틀로 정리해 보았다. 가능한 그녀의 표현대로 옮긴다. 사생활을 고려해서 이름과 이니셜은 쓰지 않기로 한다.


사실 요즘 슬럼프였는데 다시 일어나고 있어요. 예전엔 누구나 반가웠는데 이제는 아니네요. 반가운 사람이 있고 안 반가운 사람도 있네요. 근데 안 반가운 사람이 자꾸 보자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안 봐도 된다고 하고 싶지만 그 말은 도저히 못 하겠고요. 그 말을 못 하니 그것도 스트레스가 되고요. 저는 이제 정신이 괴로우면 몸이 아니라고 먼저 반응하네요. 요즘은 저만의 시간이 점점 소중해짐을 느껴요. 그래서 제가 내키지 않는 건 싫고, 내키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시간이 이제 아깝게 느껴져요. 차라리 그 시간에 밀린 잠을 자는 게 보약이겠다 싶고요.


지금 저는 과도기인 듯해요. 늘 사람 만나는 걸 좋아했는데, 이젠 제가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고 싶고(사실 그 시간도 모자람) 그냥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 건 노노! 넘 까탈스러운 건가요? 근데 이런 상태가 이제 너무 좋아요. 사람들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 그다음으로 나와 가족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단 걸 느껴요. 너무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더 그럴 수 있긴 하지만요.


이런 고백을 들을 때 나는 반갑다. 마흔이 되고 오십이 될 때 그 누가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맨 정신으로 그 숫자를 받아들이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 스물에서 서른으로 넘어갈 때의 충격과는 차원이 다르다. 생에도 허리가 있다면 절반으로 꺾이는 기분이라고 할까. 그럼에도 그녀처럼 자기 자신에게로 한 발짝 다가서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즐겁기 그지없다. 나 역시 비슷한 고민을 안고 대책 없이 흔들리며 마흔의 강을 건너왔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나는 싱가포르에 있었다. 그때 남긴 시가 있어 여기로 옮긴다. 이것으로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한다. 한 가지만 더 곁들이자면 오십이 되면 더하다는 것. 피곤한 사람은 꼴도 보기 싫어진다.



<생의 비밀>


나 오늘 그대에게 내 생의 내밀한 비밀 한 조각 보여주리니. 서른 즈음 나 한창 예뻤을 때. 영국으로 어학연수란 걸 처음 갔을 때. 그곳에서 만났네. 내 친구들 줄리아, 엘리, 모니카, 엔리코. 그들 나이 꽃 피는 이십 대 후반이었을 때. 우리 만나 아낌없이 사랑을 주고받았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서로의 사랑 지켜보았네. 그새 몇몇은 결혼을 했고, 또 누군가는 연애를 하고, 또 누구는 그 옛날처럼 아직도 혼자지. 이제 우리 자주 만나지는 못하네. 그러나 그 사랑의 향기, 지금도 내 가슴에 붉은 장미꽃 한 송이로 피어나 나를 사랑으로 이끄네.


독일에서 결혼을 했네. 유월의 신부가 되었네. 멀리서 가족들이 왔고, 사랑하는 내 친구들도 왔다네. 그림처럼 작고 예쁜 마르부르크의 성 아래에서였네. 독일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이 노래를 불러주었네. 눈물이 났네. 눈부신 햇살 아래 춤도 추었네. 눈처럼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왈츠를 추었지. 월드컵이 열리던 해였네. 결혼식이 끝나고도 오랫동안 우리나라가 승승장구하던 바로 그때였네. 한국이, 내 나라가 그토록 장하고 또 장하던 그해 유월. 환희와 감동이 한 몸 되어 서로의 손가락에 반짝이는 은빛 반지를 끼워주며 눈물 글썽이던 바로 그 순간.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네. 숱한 곳을 돌고 돌아 나 지금 여기 서 있네. 돌아보니 어느새 불혹이었네. 한때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이리저리 헤맨 적 있네. 부질없었네. 부질없음을 깨닫자 한 순간 환하게 열리던 마음. 새로움이 나였네. 열린 그 마음이 나였네. 비워야 다시 차오르지 않나. 열려야 새로운 곳으로 또 한 발 내디딜 수 있지. 돌아보면 언제나 혼자가 아니었네. 내 안의 나, 늘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네. 내게 손 내밀고 있었네. 이제야 알았네. 비로소 내 생에 물기 감도네. 음악이 흐르고 시가 흐르네. 다시 사랑이 흐르네. 나 결코 혼자가 아니었으니.



*브런치 Minjin Park의 독서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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