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에 대처하는 법은 무엇일까. 이사벨라는 그 문제를 율리아나 혼자 당당히 대처하길 바랐다. 그리고 율리아나는 무사히 그 미션을 완수했다.
수요일엔 우리 아이와 율리아나를 내가 픽업했다. 율리아나 할머니가 율리아나 남동생 초등학교 입학 문제로 어디 가시고, 율리아나 아빠 지미는 대사관 출장 관계로 연일 바쁘고, 율리아나 엄마 이사벨라도 직장 때문에 시간을 못 맞췄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부탁을 은근히 좋아하는데 육아 품앗이는 필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 둘과 집으로 돌아오자 이사벨라가 우리 집 앞 이태리 레스토랑 야외 테이블에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율리아나 집으로 갔다. 이럴 때 서로 이웃이라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오후 5시 반에 초인종이 울렸다. 아이가 다시 돌아올 리도, 남편이 이렇게 일찍 퇴근할 리도 없는데. 1층 출입문 벨을 눌러주고 현관문을 열어놓고 기다렸더니 뜻밖에도 린다였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화요일 독일어 수업 때 요즘 새로 일하는 케이크 전문점에서 조각 케이크를 가지고 오겠다 했었지. 그런데 전날 가게 케이크가 다 팔리는 바람에 못 가져왔다고 엄청 미안해했었다. 난 괜찮은데. 수요일 퇴근할 때 몇 개 가져다주겠다고 하더니 일곱 조각이나 들고 왔다. 당일 먹어야 맛있다며. 반갑게 맞이하고 고맙게 받았다. 린다의 얼굴이 기쁨에 가득 차 있었기에.
이걸 어쩐다. 우리 집에는 케이크를 즐기는 사람이 없었다. 조카는 밤늦게 오고 아침에 케이크를 먹을 리도 없지 않은가. 아이는 혼자 돌아오겠다고, 엄마가 데리러 올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케이크를 들고 율리아나 집으로 갔다. 아이들과 이사벨라와 함께 사이좋게 한 조각씩 해치웠더니 그제야 해결이 되었다. 케이크를 먹고 나자 아이들의 마법 시연이 30분 이상 계속되었다. 즐겁게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이사벨라가 말했다. 자기도 어릴 때 꼭 우리 아이 같았다고. 혼자서 자란 탓에 수줍음이 많았고 학교에서는 제일 조용하고 얌전한 아이로 통했다고.이사벨라가 아이 둘을 낳은 이유겠다.
린다가 일하는 140년 된 케익 전문점. 거리 이름이 행복로(Glückstraße) 1번지라니!
이사벨라의 말에 의하면 최근 율리아나는 L이라는 친한 친구에게 결별을 선언한 모양이었다. 나도 아는 아이였다. 3학년 초에 사립학교에서 전학 온 이태리 가족. 율리아나가 그 친구랑 너무 친해서 아이가 고뇌하는 모습을 몇 번 목격한 적이 있었다. 우리 아이가 L을 싫어한 건 당연지사. 나라도 싫겠다. 우리 아이에게 율리아나는 Best Friend Forever 지만 율리아나에게 우리 아이는 그 정도는 아닐 것이다. 우등생인 데다 인기가 많은 율리아나에게 친구가 많아도 너무 많다는 것이 우리 아이의 고뇌의 원천이었으므로.
좋아하는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을 독점하고 싶은 마음은 애나 어른이나 똑같다. 그것이야말로 욕망의 기본일 것이다. 아이에게 말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괴로움이고,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감정이며, 어른들도 같은 문제로 고통을 느낀다고. 그럼 방법은? 자고 나면 기분이 나아진다. 내가 아이에게 준 답이다. 역시 그랬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다음날 아이는 훨씬 나아 보였다. L 역시 소유욕이 컸던지 율리아나가 자기랑만 놀아주지 않는다고 괴롭히기도 하고 친구들 앞에서 모욕을 주기도 한 모양이었다. 애정과 애증의 간극은 이다지도 좁다.
모욕에 대처하는 법은 무엇일까. 이사벨라는 그 문제를 율리아나 혼자 당당히 대처하길 바랐다. 부모와 선생님이 개입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언제까지 아이 뒤를 따라다니며 해결사 노릇을 해 줄 순 없으므로. 독일 초등 3학년이 배우는 사회과학 과목을 독일어로 하에스우(HSU:Heimat- und Sachunterricht)라고 부른다. 얼마 전에 아이들은 이 과목에서'노'라고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나를 괴롭히거나 불쾌하게 만드는 모든 상황과 대상에게 어떤 자세로,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하는지 내용도 무척 구체적이었고 심지어 시험까지 쳤다. 이사벨라도 그것을 상기시켰는데 다행히도 율리아나가 무사히 그 미션을 완수한 모양이었다. 매뉴얼을 배운다는 것은 이렇게 중요하다. 어른들의 세계라고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불쾌한 말과 행동에 대해 '싫어요! 하지 마세요!' 라고 당당하게 말하도록 가르치는 독일의 사회 과목.
P.s. 오전에 알바하는 가게 앞 도로에서 맞춤법을 체크한 후 올린 글이 에러가 생겼는지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세상에! 알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억을 더듬어 완성했다. 소감 한 마디.. 세상에 일어나지 못할 일은 없다! (그런데 그 다음날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소중한 깨달음 하나. 절대로 길거리에서 그러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