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도 풀렸겠다, 액땜도 했겠다, 독일 생활에서 남은 건 아우토반을 달리듯 거침없는 하이킥 뿐? 그렇게 믿으며 살아가려 한다.
유럽전역에 폭염이 몰아닥친 유월이었다. 2003년 이후로 기록적인 폭염이라 했다. 정오에 시작하는 알바에 늦지 않으려면 집에서 11시 30분에 나가는 게 최고다. 그 시간이면 가게 주인의 호감과 신뢰가 복리적금에 이자 붙듯 착착 쌓이는 건 식은 죽 먹기다. 가게에 10분 전에 도착할 수 있으니까. 그 말은 10분쯤 늦게 나와도 지각은 면한다는 뜻. 그 정도만 해도 정각에 출근하는 반듯한 모범 알바생으로서의 이미지를 구기는 일은 없겠다.
그날도 11시 15분에 알람이 울렸고, 글을 쓰느라 그랬는지 세탁이 끝난 빨래를 건조대에 너는 것을 잊어서인지 아니면 세수도 안 한 얼굴을 뒤늦게 수습하느라 급했는지 허겁지겁 신발을 꿰차고 달려 나온 시간이 11시 40분. 건물 뒤뜰에 내놓으려던 쓰레기봉투도, 우반역 옆에 버리려던 플라스틱 봉투도 못 들고 나왔다. 그런데 날씨가 하도 더워야지. 물이라도 사갈까. 갑자기 든 생각이었다. 알바 가게에서도 물을 팔고 수돗물도 깨끗하니 그냥 마셔도 되는데 하필이면 그 시간에 물은 왜 사러 갔을까.
우반역 앞 우리 동네 빵집 이름은 헬레나. 당연히 주인아줌마의 이름이겠지. 이름에 걸맞도록 풍성한 금발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헬레나 아줌마는 독일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지난 1년 반 동안 나와 아이에게 친절했던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며칠 전에도 빵집에는 미네랄워터가 딱 한 병 남아 있었는데 희한하게 그날도 딱 한 병이 있었다. 문제는 지금까지 못 보던 상표라는 것. 평소 사던 단단한 물병이 아니었다. 한번 썼나? 뚜껑 아랫쪽 찌그러짐 포착. 물은 이것 뿐인가요? 그렇다. 무뚝뚝한 목소리로 아줌마가 대답했다. 가격은 1.50유로.
빵집을 나와 우반역계단 앞에서 물병을 열자 세상에! 뚜껑이 열려 있는 게 아닌가.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 독일에서, 멀쩡한 동네 빵집에서, 이게 말이 되는가. 그러나 빵집으로 돌아서는 순간 지각이 틀림없었다. 복잡한 심경으로 알바를 갔다. 물병에는 입도 대지 않았다. 알바를 마치고 평소 쾌적하고 서늘하던 우반역으로 항하는데 거기도무덥기는 마찬가지. 거기다 목까지 말랐다. 설마 죽지야 않겠지?한 모금을 마셨더니 기분 탓인지 수돗물 비슷한 맛이 났다. 이 아줌마가 진짜!하도 더우니 꿀꺽꿀꺽 반 병을 들이부었다.
아이를 데리고 하교하는 길에 다시 빵집에 들렀다. 무거운 아이의 책가방보다 소심한 내 발걸음과 마음이 더 무거웠다. 이걸 누가 믿어주나? 발뺌하고 나를 이상한 아시안으로 취급하면 어쩐다? 그래도 진실을 알고 싶었다. 아줌마가 정말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 행인지 불행인지 아줌마는 없고 남녀 청년 알바 둘만 사이좋게 근무 중. 물병은 커녕 물 뚜껑도 못 꺼내고 바게트만 사들고 나왔다.내가 이놈의 빵집을 다시는 오나 봐라. 헬레나여, 멋진 이름 가지고 인생 그렇게 살지 마시라.
그로부터 3주 후. 그때까지 발길이 뭔가. 빵집은 돌아보지도 않고 살았다. 어제는 대망의 목+금 휴무의 첫날. 오후에 현경이네를 집으로 초대했다. 브루스케타를 만들려니 바게트가 필요해서 아이를 픽업하러 가는 길에 급히빵집에 들렀다. 헬레나 아줌마가 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물! 하고 외쳤다. '너, 그 물병 열려 있었어! 그날 계속 널 기다렸어.' '아! 그때는 출근하느라 못 오고 퇴근하며 들렀더니 안 계시더라고요.' '아이고, 너 가고 다른 손님이 자기가 뚜껑 연 물을 차게 식히려고 넣어놨었대. 그걸 모르고 내가..' 그럼 그렇지! 그날 아줌마는 내게 물값 1.50유로를 돌려주셨다.
이것이 말도 안 되는 '뚜껑 열린 미네랄워터 사건'의 전부다. 그럼 바게트는 뭐냐고? 글쎄, 그래서, 발걸음도 가볍게 바게트를 들고 아이를 픽업하러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갔는데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어야 말이지. 내가 탈 버스는오고 할 수 없이 무단 횡단 감행. 버스 뒷문을 향해 잽싸게 달려갔지. 그때 버스 문이 닫히며 바게트 1/3이 버스뒷문 고무 박킹에 낀 것. 일단 바게트를 부러뜨린후 중간문으로 승차. 버스 뒤쪽의 바게트를 수습하러 가는데 뒷문을 향해 역방향으로 앉은 아이 엄마와 5세 남자아이의 대화가들렸다.
-엄마, 저게 뭐야?
-글쎄, 저게 뭐지?
그 순간 내가 등장, 당당하게 바게트를 잘라 그들 앞자리에 앉자 그 둘이 하하하하, 큰소리로 웃었다. 나도 어깨를 으쓱하며 큰웃음으로 화답했다. 버스 뒷문에 낀 것이 바게트라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하면서. 나의 액땜은 그날 바게트가 대신 해 준 셈. 무시무시한 오해도 풀렸겠다, 액땜도 했겠다, 앞으로 독일 생활에서 남은 건 아우토반을 달리듯 거침없는 하이킥 뿐?그렇게 믿으며 살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