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는 바람이 불었다. 가을바람 같았다. 사랑하고 사랑했던 한국의 가을! 올해는 서울에서 입추를 맞고 처서를 보냈다.
부산을 다녀온 후 며칠 동안 서울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기가 쉽지 않다. 서울은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곳.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곳. 아무것도 안 하면 불안한곳. 내게는그랬다.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었다.몇몇 친구가 다녀갔다. 그중만난 지 햇수로사오 년쯤 된 친구도 있었다. 요즘은 친구들을 만나면 저절로사귄햇수부터헤아리게 된다. 독일로 간 이후 새로 생긴취미다.
이 정도 만난 친구가 정의하기 가장 애매하다. 학교 동창도 아니고, 직장 동료도 아니다.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사회에서알게 된 사이니엄밀히 말해서 친구도아니다. 마음 맞는 동호회 멤버? 의기투합하면 친구가 못 되라는법은없지만말처럼 쉽지가 않다. 만3년쯤 지나면 몸 담고 있는 모임이나 회원들 간에도지각 변동의 시기가 찾아오게마련이다.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는다. 모든 것이 그렇다.영원한 게없다는 걸몸으로 마음으로 확인하는 시간.그 시간을 함께 통과하면 친구가 될수도있다.
친구는 꽃을 들고 찾아왔다. 봉오리가 아주 작은 장미꽃 화분. 그리고도 많은 것을 직접 만들거나 사들고 왔다. 케이크와 잼. 심지어 우리 엄마께 드릴 봉투까지.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자. 더욱 놀란 건 그다음. 우리 엄마를 보자마자 이토록 멋진 분인 줄 몰랐다고, 생각보다 훨씬 젊으시다고, 듣기 좋은말로 추임새를넣더니어머니, 앉으셔서 제 절 받으세요,하고는엄마를 방에 앉게 하고 거실로 물러나 절을 올렸다. 명절에나 볼 수 있는 큰 절을. 나로서는해 본 적도, 보고 들은 적도 없는공손하고 공손한인사를. 그 광경을말없이 지켜보던 기분을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친구와는 집 옆 밥집에서 밥을 먹었다. 나는맵지 않아좋았던 낙지볶음 비빔밥을, 친구는 소고기 된장을 시켰다. 반찬은 정갈하게 딱네 가지. 그런 식단은언제나좋았다. 입에 맞지 않는찬이없었다. 맛있는 반찬을 무한 리필해 주는 나라가 한국 말고 또 있을까. 자꾸만 한국이 좋아지니 이를 어쩐다. 갈 날은 가까워지고, 독일의 할머니 할아버지들로부터 보고 싶구나, 전언만바람에떨어진능소화 꽃잎처럼 수북이쌓였는데.친구와는옆집 북카페에서차도 마셨다. 몸싸움까지 해가며 그날은당연히내가 밥을 사고 차를샀다.
한가한 날들을 틈타 그리운 선생님도 찾아뵈었다. 하루는 비 오는 저녁 한강에서 크루즈를 태워주셨는데 빗물에 휠체어 바퀴가 미끄러져 옆에 있던 우리 언니의 콩알 만한 간이 떨어질 뻔한 일도 있었다. 정작 선생님이나 전해 듣는 나는 태연했건만. 또 하루는 선생님의 오피스텔에서 가까운 밑반찬 가게에서 공수한 차가운 콩나물국과 멸치와 생선과 감자조림으로 점심을 먹었다. 한낮의 햇볕과 에어컨과 선풍기 바람에 두런두런오가는옛이야기 들이 깃털처럼날아다니던 오후였다. 이런 날들이 두고두고 생각날 좋은 날인 것이다.
어젯밤에는바람이불었다. 가을바람 같았다. 사랑하고 사랑했던 한국의 가을! 올해는서울에서 입추를 맞고 처서를 보냈다.가족들과 대형 마트에서 어슬렁거리며 과일을 사고, 푸드 코트에서 소박한저녁을 먹고, 할머니 댁에서 아이는 짱구를 보고, 이모와 함께 소파에 앉거나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후식으로 잘 익은 복숭아를 먹는 저녁. 독일에서 꿈꾸던 완벽한 평화. 이런날들을 며칠째 보냈다. 어제는처서였다. 이날을 잊지 않으려 밤에 집 앞 공원을 걸었다. 동네 공원의소란함마저정겹기만했다. 한여름밤아이들뛰노는 소리, 강아지들짖어대는소리. 이런 날들이 서울에서는 아무것도 안 한 날들이라니!그 밤에 매미는 또얼마나 울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