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는 타이밍이다. 독서에 불이 붙었을 때 아이의 독서 근육을 키워줘야 한다. 표 안 나게 슬쩍 등을 밀어서 온 몸이 따끈한 독서의 온천물에 푹 잠기도록.
아이가 푹 빠진 책 <마법의 향기 약국(260쪽/14유로)>
아마존에 주문한 아이의 책이 도착했다. 날씨도 화창한 금요일 오후였다. 배송 예정일이 다음 주 월요일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오다니! 더구나 지금이 어느 때인가. 날아가는 새도 움츠리고 물속의 물고기도 몸을 사리는 코로나 시절 아닌가. 아이는 기쁨을 표현하기 어려운지 책을 가슴에 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원래 저렇게 책을 좋아했나.냉철하게 말해서 그정도는 아니었다. 말 그대로 아이가 책에 딱 꽂힌 모양이었다. 운이 좋았다. 반 아이들도 많이 읽는 책이었다.
책의 제목은 <마법의 향기 약국 Die Duftapotheke>. (직역하면 '향기 약국'인데 아이 말로는 약국과는 상관이 없고, 마법의 향기 이야기라고 했다). 우리 집에는 1~3권이 있었다. 휴교령이 내린 후부터 읽더니 점점 열광하기시작했다. '책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같은비현실적인 멘트까지 날려가면서. 어느 날은 내가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가 12시쯤 깼는데 아이 침대맡에 독서등이 켜져 있었다. 아이 왈, 책을 보다가 불을 껐는데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도저히 잠이 안 오더라나. 아이 방을 나오며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알지, 저 마음!
아이는 드디어 독서의 세계에 두 발을 담근 것이다. 수영을 싫어하던 아이가 잠수와 다이빙 경험을 통해 물에서 노는 즐거움을 깨달은 것처럼. 독서도 좋아하는 책에 푹 빠져봐야 안다.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책을 읽는 즐거움말이다. 그런 건 시켜서 되는 게 아니다. 책 말고도 재미있는 일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폰이나 아이패드에 상대가 안 된다. 그래서 귀하다. 돈으로 살 수도, 가르쳐줄 수도 없다. 몸에 익을 때까지 시간도 걸리고 힘도 들지만 평생의 자산이 된다. 부동산과 주식 시장은 잘 모르겠고, 아무튼 3대 노후 대책에 포함된다고 확신한다. (책 대신 어떤 취미라도 대체 가능하다.)
파파가 쓰던 중고 노트북과 침대맡 독서등
독서는 타이밍이다. 저 때 아이의 독서 근육을 키워줘야 한다. 표 안 나게 슬쩍 등을 밀어서 온 몸이 따끈한 독서탕에 푹 잠기도록. 007 저리 가도록비상한 순발력이란 이런 때 필요하다. 자전거를 배울 때 뒤에서 잡아주고 밀어주던 손을 과감하게 떼는 순간처럼. 힘들게 노를 젓는 등 뒤에서 바람이 힘을 보태주듯이. 아이들은 부모가 팔 걷어붙이고 나서면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부담 때문에. 즐거운 독서가 괴로움이 되면 안 되지. 그러면 어떻게? 아이가 읽고 싶은 도서 목록을 알아내서 미리 준비해 둔다. 몰두해서 읽는 책은 금방 끝이 나니까. 아이들의 열정은 금방 식는다는 것도 염두에 두자. 독서열을 활활 지필 만한 흥미 있는 책을 박스로 준비하자.
우리 아이 역시 점점 줄어드는 페이지를 보며 아쉬워했다. 검색해보니 <마법의 향기 약국 4>가 나와있어 서둘러 주문했더니 기대보다 빨리 도착했다. 5권은 가을에 나온다고. 유후! 아이가 기대에 차서 환호했다. 야심 차게 밤새 읽겠다던 말대로 아이는 간밤에 80쪽을 읽고 밤늦게 잠이 들었다. 3월 초부터 시작한 영어책 따라 적기는 느리게 진행 중이다. 하루에 서너 줄을 따라 읽고 쓰기 위해 그전에 <우노> 게임을 최소 다섯 번은 해줘야 한다. 보너스 두 번까지 합하면 평균 일곱 번. 그래도 괜찮다. 그런 게 바로 '지는 것이 이기는 법'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일 테니까.
최근에 아이는 파파의 오래된 노트북을 물려받았다. 코로나는 장기전이 될 전망이다. 집에서만 지내는 요즘 같은 때는 부모도 아이도 지치기 쉽다. 서로 지치지 않고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남편은 아이에게 컴퓨터를 가르치기로 작정한 듯하다. 이메일 주소도 만들어주었다. 아이의 반응도 좋았다. 아이들은 새로운 걸 좋아한다. 첫 미션은 담임 선생님께 이메일 쓰기. 학교 숙제를 보낼 때였다. 파파의 도움 없이 혼자서 하도록 했다. 손에 진땀을 흘려가며 1시간이나 걸려서 임무 완수. 나는 두 사람 일에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 파파와 아이만의 영역도 필요하다. 이건 핑계고, 어차피 그쪽 분야는 내 관심사가 아니라서.
둘째 페이지 마지막 문장을 눈여겨 보시라. 말 갈기가 휘날리듯 휘갈긴 흘림체의 의미는?
그 대신 나 역시 다음과 같은 일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한다. 아이의 변화와 성장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 아이가 의미 없이 흘린 말을 주워 담는 일. 언젠가는 부모인 우리도 잊고 당사자인 아이도 기억 못 할 말들 말이다. 예를 들면 이번에도 아이에게 몇 번을 부탁해서 독서열에 불타는 아이의 노래를 받아 적었다. 마지막 단어를 조금 길게 빼면 랩이 되는 비법도 영민하게 알아챘다.즉흥적인 아이의 노래 가사는 부를 때마다 조금씩 달라졌지만 의미는 이랬다.
책을 읽다가 너무 늦어서 잘려고 불을 껐-지
하지만 책이 어떻게 됐는지 너무 궁금했-어
1분도 안 돼서 다시 불을 켜고 책을 읽었-어
그러다 아침 1시가 되었고 너무나 피곤했-지
궁금은 했지만 책을 닫고 불 끄고 잠을 잤-어
다시 학교가 시작되면 아이는 기타를 배우고 싶어 한다. 기타면 어떻고 하모니카면 어떤가. 바이올린과 피아노부터 배워야 한다는 규칙은 중요하지 않다. 악기도 운동도 보여주고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 즐겁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책처럼 평생 함께 할 수 있으면 최고다. 기타는 작년에 바바라 고모집에서 얻어 왔다. 먼지가 쌓여가는 걸 몇 번 쳐보더니 배우고 싶다고 우겨서. 코로나여, 속히 물러가다오. 아이들의 호기심은 길게 지속되지 않는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