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에는 기린이 산다

독일 시부모님과 동물원을 가다

by 뮌헨의 마리


사람도 나이를 먹으면 기린이 되나 보다. 기린을 닮아가는 삶. 순한 낯빛과 눈빛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삶. 요즘 시아버지 오토가 그렇다.


동물원에는 기린이 산다.



베를린 출신으로 슈탄베르크에 계시는 시아버지 오토는 동물원을 좋아하신다. 어릴 때 동물원 근처에 사셔서 동물원이 놀이터였다 한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면 동물원 마당에서 사셨다고. 나의 시어머니 카타리나와 재혼하신지는 40년. 요즘 카타리나는 구십이 넘은 오토를 위해 추억의 장소들을 찾아다니시는 듯하다. 그의 생이 길지 않다고 판단하셔서가 아닐까. 팔십이 넘은 어머니에게 쉬울 리는 다. 아무리 건강하시다 해도 말이다. 진실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실 때.


코로나 이후 두 분을 찾아뵙는 것은 한 달에 두 번 정도다. 매주 들르던 이전의 루틴에 비하면 느슨해졌다. 두 주마다 오토의 손톱도 꽤나 길다. 치과 의사였던 그는 청결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매일 손톱을 깎고 끌칼로 다듬을 정도였으니 직업병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환자의 입 안에 상처를 내면 안 된다는 강박으로. 그런 그도 나이와 함께 꽤나 누그러지셨다. 우리가 독일에 온 2년 전만 해도 혼자서 걷고 움직이셨는데, 그 사이 두 번이나 쓰러지신 후로 휠체어가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마저도 혼자서는 못 앉으시고 누군가가 도와드려야 한다.



플라멩고. 물가에는 얼룩말.



두 분을 모시고 뮌헨의 동물원에 간 것은 시월의 첫째 주말 인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동물원으로 가는 줄 몰랐다. 대부분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이었다. 바바라가 전날 E-Ticket을 끊고 자전거로 달려오는 동안 우리는 버스를 다. 종점인 동물원까지는 버스로 10분. 카타리나와 약속 장소는 입구 두 곳 중 핑크빛 플라멩코가 있는 쪽이었다.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플라멩코의 여리고 긴 다리. 설마 벌써 추운 건 아니겠지. 너의 다리보다 긴 겨울이 남았는데. 기다리던 해는 오전 내내 나오지 않고.


그날따라 추워 보인 건 플라멩코뿐이 아니었다. 40년 동안 데면데면하던 분의 휠체어를 싫은 내색도 없이 밀고 있는 남편의 뒷모습에도 자꾸만 눈길이 갔다. 그날따라 왜 그렇게 얇은 쟈켓을 걸치고 나왔는지. 남자들은 죽어라 말을 듣지 않는다. 봄가을에 입을 만한 두툼한 쟈켓을 사자고 몇 번을 말해도 싫단다. 그게 싫으면 따뜻한 스웨터라도 받쳐 입고 나오든가. 아침 저녁으로 춥다 해도 가을인데 한겨울 패딩을 입고 나가는 날도 있다. 본인은 무신경, 나만 신경 쓰이나. 동물원 매점이 보이자마자 뜨거운 라테를 나눠마셨다. 바바라는 카푸치노, 카타리나와 오토는 에스프레소 한 잔씩. 아이는 뭘 마셨더라?



지붕에는 단풍. 나무 데크엔 가을 발자욱. 낙엽은 노랑,



그날 가을이란 가을은 모조리 동물원 안에 모아놓은 듯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저만 알던 거인>의 겨울 풍경처럼. 우박, 서리, 북풍, 눈보라 대신 노란 단풍, 빨간 단풍, 단풍이 들다만 갈색의 잎들, 물가에 비치던 푸른 하늘, 그 사이로 선명한 나무들의 검은 그림자. 서늘한 물 위로 붉은 마음 숨기지 못해 이리저리 흐르던 낙엽의 무리, 지붕 아래로 아무렇게나 드리워진 나뭇가지들의 자태. 그 아래 서서 마른풀을 먹던 얼룩말. 날씨가 추워져 동물들을 보지 못한 건 다행이었다. 보면 뭐 하나. 마음만 춥지. 공원을 산책하듯 느릿느릿 동물원 산책길을 걷다가 차이는 가을을 가슴에 모조리 쓸어 담았다. 나무와 하늘과 바람과 물과 새들. 동물원에는 동물만 사는 게 아니었다.


동물원 매점에서 커피를, 노천 식당에 앉아 점심을 먹고 돌아 나올 때 시월은 아직 희망을 가져도 되는 달. 한 해가 세 달이나 남은 달. 꽃은 지고, 잎은 떨어져도 뭔가 해 볼 용기를 주는 달. 무엇을? 마무리든 새로운 시작이든 뭐든. 올해 나는 무엇을 이루려 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겨울에서 봄 여름, 가을로 오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다. 코로나를 빼고 가장 큰 이슈는 주변의 부모님들. 한국에서는 J언니 아버님의 부고도 있었다. 독일에서는 레겐스부르크의 어머니 힐드가드의 무릎 수술도. 수술 후 통증으로 밤잠을 못 주무신다는 말씀, 갈라진 목소리에 마음 아프던 가을밤. 일이 없는 날은 달려갈 수 있는데 나중에 오라시던 어머니.



새와 수레. 동물원의 물레방아. 물 위의 수묵화. 낙엽은 꽃이 되고.



동물원에 가면 기린을 본다. 긴 목, 긴 다리. 육중한 몸. 높은 나뭇가지의 잎을 따먹는 기린을 본 적도 있다. 저 잎을 먹고 체력을 유지할까. 얼마를 먹어야 배가 부를까. 돌발 상황이 왔을 때 무거운 몸을 쉽사리 일으킬 수 없어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기린. 서서 자는 기린. 그러고도 네 다리가 성하다니. 대체 어떤 강철로 만들었길래. 마음은 관두고라도 아프지는 말거라. 너를 보기 위해 잊지 않고 사철 찾아오는 이유. 내가 오지 않는다고 네 삶이 달라질 리야 없겠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네 존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서. 왔으니 지켜야지. 비싼 입장료가 나무 되고 잎이 되고 너의 피와 살이 되기를.


사람도 나이를 먹으면 기린이 되나 보다. 기린을 닮아가는 삶. 순한 낯빛과 눈빛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삶. 긴 다리는 쉬어도 좋다. 더 이룰 것도 미련도 없다. 시아버지 오토가 그러하시다. 야망도 열정도 과도하게 넘치던 분. 그로 인해 주변을 부담스럽게 만들던 분. 무려 구십이 될 때까지. 요즘 나는 오토를 만날 때마다 고요하고 낮은 목소리를 듣는 게 좋다. 자신을 관조하고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도 좋다. 아이들을 향한 무한한 애정과 신뢰도. 그때 그의 내면에는 한 마리 기린이 산다. 노쇠한 육체를 가진 한 노인이 아니라 여린 영혼의 기린.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도 살고 있을 게 분명할 그 기린이.



떨어진 낙엽마저 고운 뮌헨 동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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