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뮌헨의 마리 Dec 02. 2020

슬픔이라는 묵직한 이름

프랑수아즈 사강


의사를 만나기 전 복도에서 나는 <작가란 무엇인가 3>의 마지막 편 프랑수아즈 사강을 만났다. 문제는 망할 인터뷰어들이었다. 그들이 사강에 갖다 붙여 놓은 인터뷰 제목을 보라. 내가 그날 의사 앞에서 눈물을 보인 건 저 묵직하고도 아름다운 제목 탓이었다.


<작가란 무엇인가 3> 중 프랑수아즈 사강 편.



월요일 이른 아침 병원 복도에 정밀 검사를 위해 호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료라고 하기엔 중대하고 수술이라 부르기엔 경미하다고 의사와 간호사가 말했다. 그 말은 맞을 것이다.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때로는 모든 걸 누군가에게 맡겨버리편이  편할 때가 있다. 특히 그들이 전문가라면. 약국은 약사에게. 병원은 의사에게. 운전은 남편에게.(그날 아침처럼 그가 운전대를 잡을 경우엔.) 급할 땐 운명마저도 맡길 용의가 있다. 그날은 11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접수부터 수술실까지 혼자 들어갔다. 수술실이 원래 혼자 가지, 둘이 들어가는 데는 아니지.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대기실부터 수술실까지를 아늑하다고 부를 수야 없겠지만 기분은 그랬다. 이 편안함은 뭐지. 이 안도감은 뭐지. 다정하다고까지 느껴지는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병원에는 월요일 아침 7시 30분에 도착했다. 수술실 앞까지 가는 길을 두 번 물어서 갔고, 도착 후에는 문에 붙은 지시대로 벨을 눌렀다. 너무 빨리 도착했는지 벨이 한참 울린 뒤 누군가가 기다리라 했다. 7시 45분. 복도로 난 육중한 문이 열리더니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녀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가자 락커룸이 나왔다. 간호사가 내게 건네 물품을 들고 자기 이름을 했다. 저는 아넷이에요. 키가 컸던 그녀는 유치원 신입생을 대하듯 무릎을 살짝 구부려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마스크를 음에도 그녀가 미소 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긴장이 풀어졌다. 내가 긴장을 구나. 몰랐다. 평상시처럼 잤고, 컨디션은 좋았다. 자, 무슨 검사가 필요하세요? 빨리 끝내버릴까. 몸도 마음도 준비가 되었다. 링 위로 오르기 전 가볍게 몸을 푸는 복서처럼.





월요일 아침 730분까지 병원 1층으로 오세요. 

병원에서 정밀 검사 예약 시간을 전화로 알려준 건 금요일 오후였다. 그날 오전에는 초진을 했다. 통증이 있던 날로부터 사흘째. 전날에는 예약 없이 병원으로 갔다가 그냥 돌아왔다. 여의사가 명함을 주며 전화로 예약을 잡으라, 했는데. 그러면서 내 성까지 물었는데. 그러면 뭐하나. 병원에 전화 연결이 안 되는데. 개인 정보 보호로 명함에는 핸드폰 번호도 없었다. 남편이 명함에 적힌 대로 이메일을 보내자 다음날 일찍 병원으로 오라는 답장. 초진 예약은 그렇게 다. 코로나로 보호자 없이 나 혼자 진료실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긴장했다. 혼자서 잘할 수 있을까. 다 알아들을 수 있을까. 접수 후 안내실에서 간호사가 묻는 질문에 답을 하고, 내주는 서류를 들고 진료실 복도에서 대기했다.


초진 날 아침 복도에서 나는 세 시간을 기다렸다. 두 시간을 기다리다 간호사에게 가니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다시 가서 지금 세 시간째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하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류의 행방을 물었다. 혹시 자기 서류를 아직도 고 있냐고. 당연하지. 서류들은 내 가방 안에 얌전히 들어있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나?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서류를 복도 어느 방에 갖다 줘야 나를 부른단다. 난 누가 부르면 가는 줄 알았지. 이런 미련한! 간호사의 마지막 설명을 놓친 게 분명했다. 다행히 전날의 통증은 없었다. 도대체 세 시간 동안 복도에서 뭘 했냐고? 나도 바빴다. 예상되는 용어와 질문을 독일어와 영어로 찾아 메모하느라. 의사가 뭐라 하면 알아들어야 하잖나. 모르고 네네만 할 수도 없고, 계속 뭐라고요만 반복할 수도 없고. 솔직히 겁도 났고.






프라우 오.

낯선 의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가 나를 진료하는 동안 마음 속으로 영어와 독일어로 번갈아가며 욕을 다. 미친! 세 시간을 허비안 했더라도 어제 명함을 받은 여의사한테 진료를 받았을 텐데. 뭐 하러 멍청한 짓을 해서 남자 의사에게 불편한... 프라우 오, 그동안 피가 자주 났을 텐데요! 의사의 질문에 정신이 돌아왔다. 진료를 마치고 모니터를 바라보는 사와 마주 앉았다. 내 시선은 그의 빛나는 이마와 정수리를 향했다. 거짓말을 들킨 학생처럼 심장이 뛰었다. 네, 몇 달 동안 나긴 했는데 폐경기라 그런 줄 알았어요. 프라우 오. 정확한 검사를 봐야 알겠지만  소견으로는 악성일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제가 나중에 양성일 수도 있으 걱정 말라 면 당장은 안심이 되시겠지만, 나중에 더 큰 충격을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야 하 저의 고충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이해했고, 그의 말도 단번에 알아들었다. 아침에 복도에서 찾아봤던 종양, 양성, 악성, 암.. 그중의 하나였던 단어도.


암일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지금 돌이켜보면 의사는  질문에 놀랐던  같다. 는 대답 대신 자신의 마스크를 벗더니 두 손에 가지런히 접어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가 들고 있는 것이 마스크가 아니라 모자처럼 보였다. 밀레의 만종에서 겸손한 한 사람이 걸어나와 내 앞에 앉은 기분. 알아차렸다. 사람의 눈과 얼굴이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하는 행위에는 얼마나 깊은 품위가 깃드는가.  모습이 숭고서 눈물이 났다. 그는 진료 중에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고 내가 속으로 욕을   사람이 더 이상 아니었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속에 나오는 인도주의 장로 같았다. 그를 따라 나도 모르게 마스크를 벗을 뻔했다. 상대에 대한 예의 같아서.


의사를 만나기  복도에서 나는 <작가란 무엇인가 3>의 마지막  프랑수아즈 사강을 만났다. 혹시나 싶어 아침에 급히 가방 속에 챙겨간 책이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안 그러면 불안할 것 같았다. 금요일 아침 9시부터 12시 사이. 약간 어두운 병원 복도의 의자. 끝까지 내 이름이 안 들리면 더 좋을 것 같던 시간. 그런다고 책이 눈에 들어오나? 들어왔다. 눈물도 함께. 망할 '슬픔' 같으니라구. 사강 때문에 눈물이 다. 인터뷰 내용은 시종일관 경쾌하고 발랄했지만. 사강이라는 그 이름처럼. 삼강도 아니고 오강도 아닌 사강. 문제는 망할 인터뷰어들이었다. 그들이 사강에 갖다 붙여 놓은 인터뷰 제목을 보라. '슬픔이라는 아름답고도 묵직한 이름'이라니. 내가 그날 의사 앞에서 눈물을 보인 건 저 묵직하고도 아름다운 제목 탓이었다. 말없이 티슈를 건네주시까라마조프가의 장로님에게 절반의 책임.




수술 대기실에서 수술복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 세상에, 수술복과 함께 받은 양말이 어찌나 따뜻하던지. 난 양말을 안 줄까 걱정했는데. 수술실 침대에 맨발로 누우면 얼마나 추운데. 포근한 이불도 덮어주었다. 마취 없이도 잠수 있을 것 같았다. 보호받는 느낌. 간호사 아넷이 상냥한 설명과 함께 체온을 쟀다. 36.8도. 곧이어 간호사 3명이 들어와서 각자의 임무에 들어갔다. 오늘이 특별히 친절한 조인 걸까. 내가 운이 좋은 걸까. 과거 두 번의 수술 때 문제는 없었냐고 셋 중 하나가 물었다. 나머지 둘은 부지런히 손등에 마취용 주사 바늘을, 손가락과 가슴과 등에 집게를 꽂고 재빨리 무언가를 붙였다. 전혀 없었어요. 하마터면 이런 사족이 튀어나갈 뻔했다.(저는 수술이 잘 받는 사람이에요!) 무사히 입을 다물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시계를 보았다. 오전 8시 6분. 저 시간을 기억해야지. 산소마스크를 쓰자 곧 잠이 들었다. 



힘내라고 아이가 준 인형과 첫 번째 아드벤트 초. 성탄절까지 매주 일요일 하나씩 더 켠다. 아이가 소원을 빌라길래 빌었지. '돈도 필요 없고요. 성적도 안 중요하고요..'


이전 01화 받아들이면 가벼워진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