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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Nov 29. 2020

받아들이면 가벼워진다

산부인과엔 언제 가봤냐고 주치의가 물었다


앨리스 먼로는 말한다. 모든 것이 선물이다. 주는 만큼 받는 거다.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지거나 가벼워진다. 나도 적극 동의한다.


<디어 라이프> 앨리스 먼로, 정연희 옮김, 문학동네



행복은 그림자의 춤이 아닐까. 며칠 동안 왼쪽 아랫배가 아팠다. 옆구리에서 안쪽으로 한 뼘. 자다가도 아프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만 해도 아팠다. 양말이나 신발을 신는 건 미션 수준. 허리를 구부려야 하니까. 한 마디로 배에 힘을 주면 아픈 거다. 또 방광염인가? 이 증상을 처음 느낀 건 2주 전이었다.  아랫배가 찌를 듯이 아파서 잠을 깼다. 이게 뭐지? 한밤중에 화장실 가는 게 귀찮아서 몇 번 참은 적은 있었다. 그것 말고는 짚이는 데가 없었다. 다음날 괜찮아졌다가 며칠 전 다시 아팠다. 아침에 약국에서 방광염 차를 사서 종일 마셨는데도 차도가 없었다. 오래전 자궁근종 수술을 하기 전에도 그렇게 배가 아팠는데. (개복 수술을 두 번 한 적이 있다. 자궁 근종 수술과 제왕절개 수술 때.)


몸이 아픈 첫날 저녁에 파리 리뷰 인터뷰집 <작가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앨리스 먼로가 맨 앞에 나오는 3권부터 펼쳤다. 예전에도 읽은 적이 있는지, 곱게 밑줄이 쳐져 있었다. 독일로 오기 전 앨리스 먼로의 단편집을 몇 권 읽은 적이 있다. 재미있어서가 아니었다. 대작가에게는 죄송하지만 재미가 없었다. 물론 작가의 잘못도 독자인 내 잘못도 아니다. 작가와 독자취향은 안 맞을 수 있으니까. 그녀의 책을 읽다 보면 작가가 행복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란 제목이 자꾸만 '행복은 그림자의 춤'으로 읽혔다. 행간마다 황량한 벌판이나 모래사막에서나 만날 법한 바람이 불었다. 어떤 글을 읽어똑같았다. 그게 싫었다.  바람은 어디서 왔을까. 작가의 마음속? 아니면 내 마음속?






최근 나는 사는 게 지루해졌다. 때론 지겹다가 때론 지긋지긋하다가. 이유는 없었다. 코로나 블루? 글쎄. 알바를 쉬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인생이 원래 그런 것인지도. 굳이 대답을 해야 한다면 말이다. 아니면 나란 존재가 원래 그랬거나.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는 작가가 되기에 어느 정도 충분 조건을 갖춘 것 같다. 행복한 작가를 본 적이 있나? 그러니 쓰기만 하면 되는데. 뭘 써야 하나. 뭘 쓰고 싶나. 그리고 왜. 그 세 가지 질문에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 그렇다고 답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다. 인생의 목적을 알고 있다고 더 잘 살아지는 건 아니니까. 그냥 쓰는 . 그냥 사는 거고. 작가 먼로를 살게 한 건 무엇이었을까.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독서는 제 삶이었어요. 책 속에서 살고 있었죠.' (<작가란 무엇인가>, 다른 출판사 중에서.)



나도 그랬다. 스무 살에서 서른 살까지. 10년 동안 닥치는 대로 읽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생각이란 걸 좀 하며 읽었어야 했는데. 그러면 남은 인생길을 선택하기 쉬웠을지도. 그녀는 어떻게 작가가 되었을까. 무엇을 얼마나 썼을까. 그녀는 말한다. 매일 아침, 일주일에 7일, 8시부터 11시까지 그야말로 강박적으로 썼다고. 그리고 걸었다고. 하루에 5킬로미터. 날마다 얼마를 걸었는지 강박적일 정도로 신경을 쓰면서. 그러니 그녀의 삶은 쓰기와 걷기가 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편 작가로서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건 2013년. 그녀의 나이 82세 때였다. 노벨상 수상 한 해 전 2012년에 절필을 선언했다. 마지막 작품집은 <디어 라이프>. (내 매거진 <디어 뮤니히>도 그녀의 작품집 제목에서 빌려왔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모든 것이 선물이야. 주는 만큼 받는 거지.'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야.' 그가 말했다.'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든 그러면 그저 그 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 (<디어 라이프>(문학동네)의 단편 '자갈' 중에서.)






둘째 날 주치의에게 갔다. 내가 좋아하던 여의사는 없었다. 아, 진짜. 주치의와마주치고 싶지 않은데. 뭐 어쩌나. 급한데 가야지. 배는 계속 아프고. 냉정하고 쌀쌀한 태도로 의사와 환자가 다시 만났다. 프라우, 오. 오늘은 어떻게 왔나요? 배가 아파서요. 왼쪽 아랫배요. 방광염인 거 같은데 차를 마셔도 안 낫네요. 진찰대에 눕자 주치의가 배 위에 초음파를 했다. 그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프라우 오, 제가 볼 땐 방광염이 아닌 것 같은데요. 방광염은 아랫배 가운데가 아프죠. 당신처럼 왼쪽이 아니고요. 그리고 소변을 볼 때 타는 듯 아파야 하는데, 프라우 오는 그것도 아니라고 하셨고요. 초음파 상으로는 난소에 물혹(혹은 종양) 같은 게 의심되는데 산부인과로 가보세요. 가시는 산부인과는 어디인가요. 아! 제가 뮌헨에 와서 아직 산부인과에 못 가봤는데요. 아이고, 이런, 프라우 오..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내 어깨를 한번 잡았다 놓았다.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과 행동 같았다. 왜 있잖나, 사람이 연민에 가득 차면 자기도 모르게 하는.         


그 짧은 동안 주치의를 불신해오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말했다. 큰 병원 산부인과 쪽으로 저희가 연결해 드릴게요. 바로 가보세요. 나는 주저하며 대답했다. 저 말의 의미가 뭐지, 생각하면서. 글쎄요, 한 번 생각해 볼게요. 남편에게도 물어보고요. 그러자 불쑥 화를 내던 주치의. 지금 프라우 오를 도와드릴 수 있는 사람은 남편 분이 아니라 저희입니다. 도와드릴까요, 말까요. 상황의 심각성도 잊은 채 감동받은 나.. 네, 도와주세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는 약국에서 살 수 있는 진통제 한 통도 같이 처방해 주었다. 그 날 나는 세 번 감동했다. 진통제를 먹자 씻은 듯이는 아니지만 통증이 80% 사라지는 게 아닌가. 이런 신통방통 슬기로우신 의사 선생님 같으니라구. 앞으로 그분을 진심으로 존경하기로 했다. 병원은 갔냐고? 갔다. 자세한 얘기는 다시 하겠지만, 난소는 아니고 자궁에 문제가 있어 보인단다. 다음 주에 정밀 검사를 받기로 했다. 이 시국에 금세 예약을 잡는 걸 보니 문제가 없지는 않은 것 같다.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다. 오십이 넘으니 예기치 않은 일도 생긴다고 야지. 놀라지 마시라고 미리 밝힌다. 왜냐고도 묻지 마시라. 그걸 누가 알겠는가. 모든 일은 '그냥' 일어날 뿐이다. 앨리스 먼로는 말한다.


살다 보면 그렇게 된다. (<디어 라이프>의 단편 '밤' 중에서.)


그녀의 글이 좋아졌다. 다시 <디어 라이프>를 읽는 밤.



<작가란 무엇인가 3> 파리 리뷰 인터뷰, 김율희 옮김, 출판사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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