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있었던 인재(人災) 앞에서
2022년 11월 19일 토요일 오후, 그날은 무척이나 화창했다. 그리고 뜬금없이 성당에 가고 싶은 맘이 들었던 날이기도 했다. 가톨릭 신자지만 성당에 잘 나가지 않아서 (맞아요, 저는 냉담자예요.) 루마니아에서도 굳이 미사를 드리러 가지 않았다. 사실 예전에 성당에서 미사를 드린 적이 있는데, 루마니아어로만 하니까 졸려서 무척 난감했던 적도 있어서......
루마니아인의 80%가 그리스정교회 신자이다. 이런 이유로 정통 가톨릭 성당을 찾는 건, 다른 유럽 국가 (특히 서유럽) 쉽지 않다. 그래서 구글맵으로 성당을 찾았고, 마침 집 근처에 100년도 더 된 고풍스러운 성당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주일 전에 한번 구경이나 해볼까 싶어, 토요일 오후에 모자를 뒤집어쓰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주일이 아니라 굳게 닫힌 성당. 잠긴 문 너머로 예쁜 성당을 구경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이대로 집에 가기는 아쉬워서, 성당 주변을 하릴없이 걷다가 특별한 풍경과 마주했다.
무엇을 추모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생각만 해도 가슴속에서 뜨거운 불이 불쑥대며 올라오는 통에, 잊으려고 애썼던 이태원 참사가 바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2022년 10월 29일 발생한 참사였으니,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았으니, 지금 이태원도 이런 풍경이겠지. 지금 한국 사람도 나와 같은 마음이겠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다시 휴대전화를 켜고 지금 어디에 서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클럽 콜렉티브", 2015년 10월 30일 '콜렉티브 클럽 화재 참사'가 일어난 현장이었다.
운명, 이라는 표현은 죄스럽지만, 그래도 운명처럼 마주 선 장소에서 한참이나 움직일 수 없었다.
콜렉티브 클럽 화재 사건은 2015년 10월 30일 발생했다. 이 화재로 27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180명이 부상을 당했다. 당시 콜렉티브 클럽은 비상구라고는 없이 운영되었고, 안전시설은 당연히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업 허가를 손쉽게 받았다.
루마니아 정부는 11월 2일과 3일을 국가애도기간으로 선포했고 (이태원 참사 사망자는 159명이었는데, 우리나라는....), 부쿠레슈티 시민들은 기부금을 모았고, 헌혈을 위해 병원을 너도나도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3일부터 루마니아 시민들이 광장으로 뛰쳐나와 시위를 펼치기 시작한다.
루마니아 시민들은 총리, 장관, 섹터 4 시장의 사임을 요구했다. 소방서의 허가 없이 클럽에 운영권을 줬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고 발생 후 4개월 동안, 화상 전문 병원으로 옮겨져서 치료를 받던 부상자들 가운데 37명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사인은 '박테리아 노출'
피해자 유족들이 당연히 진상 규명을 요구했고, 정부와 병원은 당연히 모르쇠로 일관했다. 유족을 도와준 건 바로 기자였다. (여기서 우리나라와 너무 차이가 난다.) 사건을 추적한 결과, 병원에서 기준치보다 무려 10배가 희석된 소독제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더 놀라운 건, 이 소독제가 루마니아의 거의 모든 병원에 유통되었다는 사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고민할 필요도 없는 현실이 싫다. 당연하게도 정부, 의료기관, 기업, 병원장이
사이좋게 서로 뒤를 봐주면서 부정부패를 저질렀던 것. 예상을 너무 벗어나지 않아 더 씁쓸하다. 재판이 시작되었는데 이 역시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상대가 정치인과 병원, 기업 등이었으니 지지부진 그 자체였고, 당연히 꼬리 자르기로 이어졌다.
이 이야기는, 2019년 다큐멘터리 영화 <collective>로 만들어졌고, 각종 영화제의 상을 휩쓸었다.
https://www.imdb.com/title/tt10706602/
2021년에는 아카데미 영화제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는데, 루마니아 영화 역사 상 최초의 일이었다. 국제장편영화상과 장편다큐멘터리상의 후보였는데 수상에는 실패했다. 그해 국제 장편 영화상은 <기생충>이 받았다.
이 이야기는, 부쿠레슈티 대학교 한국학과 학생들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루마생'에서 다루기도 했다. 한글 자막을 넣었어야 했는데, 너무 힘들어서 못 넣었다. 루마니아 역사와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엘미라. 그 덕분에 나도 많이 공부했다.
(궁금하신 분은 https://www.youtube.com/watch?v=Oo8Bf_tzy7w 에서 보시면 됩니다.)
2015년 10월 30일에 일어난 참사이니, 벌써 7년이 지났다. (글을 쓴 당시가 2022년이었으니, 올해는 9주기가 되었다.) 희생자를 추모하는 공간 속의 꽃과 촛불 그리고 사진은, 세월의 흔적이 많이 느껴졌다.
콜렉티브 클럽의 간판도 글자가 떨어져 나가, 사고의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한 때는 눈이 시릴 것 같은 조명과 귀를 찢을 듯한 음악과 함께 했던, 화려한 공간이었을 <콜렉티브>는 인적 하나 없는 흉물스러운 폐건물이 되었다.
여기에서 이태원과 세월호를 어떻게 안 떠올릴 수 있을까. 권력자들의 욕심과 부패 때문에 일어난 참사의 현장 앞에서, 같은 결의 비극은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충분히 피할 수 있던 인재였고, 인재의 희생자가 너무 어린 청년들이었으니까.
사실, 1029 이태원 참사를 입에 올리는 것도 힘들었다. 처음엔 황망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여전히 그 참사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화가 난다. 마음을 잡으려고 노력할 때마다,
툭툭 터지는 망언에 가까운 발언도,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다.
그날의 참사는 점점 잊히고 있다. 흔적만 겨우 남은 '콜렉티브' 클럽처럼, 언젠가는 사람들의 기억에도 옅은 자국만 남겠지. 그리고 그것을 간절하게 바라고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겠지. 대중의 눈과 귀를 붙잡으려면, 언론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우리나라 언론은 이미 틀렸다.
부쿠레슈티에 올 계획이 있는 분 가운데, 혹시라도 이 사건에 관심이 있다면, 콜렉티브 추모지에 한번 들러보면 좋을 것 같다. 작은 꽃이나, 작은 향초를 하나 들고 와서, 희생자들을 기리는 것도, 의미 있는 여행이 되지 않을까.
Find local businesses, view maps and get driving directions in Google Maps.
www.google.com
첨언.
내일은 이태원 참사 2주기이다. 이런 불행은 다신 일어나선 안 되고, 이런 불행이 왜 일어났는지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 물론 쉽지 않겠지. 루마니아 콜렉티브 참사의 원인이 되었던 사람들도 다시 시장이 되고, 병원장이 되는 현실이니까.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놀러 가서 죽었는데 왜 유난이야?"
놀러 가서 죽으면 왜 비난받아야 하나. 놀러 가서 죽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들 생각을 해야 하는 게 먼저 아닌가. 길바닥에서 159명이 죽는 세상, 그거야 말로 진짜 잘못된 세상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