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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리지 Dec 21. 2020

사랑과 벚꽃의 공통점

벚꽃연무


    "넌 무슨 꽃이 제일 좋아?"

    "나? 벚꽃!"


어릴 적부터 벚꽃철이 되면 가족들과 늘 벚꽃 구경을 갔다. 부산의 우리 동네에는 오래된 아파트 단지가 있다. 5층밖에 안 되는 낮은 건물에 페인트도 촌스러운 연분홍색이었지만 봄만 되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만 아는 숨은 벚꽃 명소이기 때문이다. 아파트 단지 안의 도로를 따라 양 옆으로 늘어진 벚나무들이 서로 만나 터널 같은 벚꽃길을 이뤘다. 천장을 이뤄 하늘을 가리는 벚꽃송이들과 눈처럼 바람에 날리던 벚꽃잎들은 그 촌스럽던 분홍색 페인트조차 예뻐 보이게 만들었다.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던 여고생 시절, 야자가 끝나면 일부러 그 아파트 단지를 지나 집으로 왔다. 빙 둘러오는 길이었지만 알전구가 켜진 밤벚꽃은 너무 낭만적이었다. 미래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꼭 이 길을 함께 걷고 싶다고 생각했다.


20대가 되자 본격적으로 벚꽃 구경을 다녔다. 서울의 벚꽃 명소는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유명하다는 벚꽃 명소를 찾아다녔다. 석촌호수, 어린이대공원, 남산, 강릉 경포대, 제천 청풍호, 춘천 소양강댐, 진해 벚꽃축제까지. 피는 시기는 지역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어딜 가나 탐스러운 분홍빛 파도가 넘실거렸다.

 


"왜 벚꽃을 제일 좋아하는데?"


친구의 질문을 듣고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왜 벚꽃을 가장 좋아할까? 그러다가 내가 추구하는 사랑의 모습이 벚꽃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나, 벚꽃은 온통 분홍빛이다.


벚꽃은 다른 색 없이 그저 분홍빛이다. 연둣빛 새순이 올라오고 초록빛 잎으로 무성하게 덮인 뒤에 꽃이 나는 대부분의 나무들과 달리, 벚나무는 잎이 나기도 전에 꽃이 먼저 핀다. 그래서 벚꽃이 만개했을 땐 다른 색은 찾아볼 수 없다. 만개한 벚나무는 마치 어린아이가 들고 있는 솜사탕 같다. 다른 색의 간섭 없이, 오직 분홍이다.

나는 사랑에 있어서도 다른 색깔 없이, 온 힘을 다해 분홍이고 싶다. 계산 없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만 가득한, 바보처럼 순수하기에 더 아름다운 사랑. 사랑에 모든 걸 올인하면 상처 받기에, 마음을 덜 주라고들 한다. 사랑에 깊이 빠질수록 극복해야 할 상처도 그만큼 크다. 그리고 그 상처를 여러 번 겪고 나면 다음 연애를 시작하기 점점 두려워진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 감정 소모하기도 싫고 더 이상 이별에 상처 받기도 싫어 갈수록 요리조리 따져보고 재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사랑을 시작하기가 더 힘들어진다는 언니들의 말이 점점 와 닿는다. 사랑의 시작이 점점, 어렵다. 


생각지도 못한 이별로 인해 상처 입은 마음을 부여잡던 시절,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는 싶지만 또 상처 입을까 겁먹었던 시절, 스스로 일어날 힘이 없어 누군가 내 손을 잡고 일으켜주길 바라던 시절이 있었다. 


    "그냥 가볍게 만나. 적당히, 다치지 않을 정도로만 마음 주고, 안 맞다 싶으면 그만하면 되지."


주변에선 일단 가볍게 만나 보라고 했다. 적당히 마음의 한 켠만 내어주고 상처 받을 만한 상황이 생길 것 같은 조짐이 보이면 먼저 끝내버리라고. 그래서 가벼운 호감 정도를 가지고 관계를 이어가려 했지만, 결국 그 사람에게 미안해질 일이 생겼다. 내가 상처 받기 싫어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 것이다. 


    '이건 내가 아닌데, 이건 사랑이 아닌데.' 


연애를 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서점에서 이 책의 제목이 운명처럼 눈에 박혔고, 나는 홀린 듯이 책을 집어 들었다.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 우리는 멈추어 서서 혼란에 빠진다. 내가 더 많이 줄까 봐. 내가 더 많이 좋아하고, 내가 더 많이 사랑할까 봐.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했고, 사랑한다는 것은 발가벗는 일, 무기를 내려놓는 일, 무방비로 상대에게 투항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토마스 만의 말대로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지는 법"이라는 악착스러운 진리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이 사랑하지도 말고, 그래서 다치지도 않고, 그래서 현명한 건 좋은데... 그래서 그렇게 해서 너의 삶은 행복하고 싱싱하며 희망에 차 있는가, 하고. 그래서 그 다치지도 않고 더 많이 사랑하지도 않아서 남는 시간에 너는 과연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中,  #34. 사랑하지 않으면 


이 글을 읽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래, 나는 그 다치지도 않고 많이 사랑하지도 않아서 남는 시간에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 다치지 않는다고 해서 과연 나의 삶은 행복하고 싱싱할까. 그래서 다시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다시 나답게 사랑하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아주, 편해졌다.


이런 사랑을 누군가는 당연히 여길 수도, 누군가는 하찮게 여길 수도, 누군가는 부담스럽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젠간 나에게 맞는 그릇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리라 믿는다. 사랑 받음에 감사하고, 자신의 전부를 다해 나를 사랑해줄 준비가 된 사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어떤 불순물도 없이 순수하게 채우고 싶다. 벚꽃처럼, 온 힘을 다해 분홍이고 싶다.


둘, 벚꽃은 지는 모습도 아름답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 열흘 붉은 꽃은 없다  -  모든 꽃은 지기 마련이다.

목련도 벚꽃처럼 잎이 나기 전에 꽃이 먼저 핀다. 새끼오리 날개처럼 보드랍던 아이보리빛 꽃잎은 땅에 떨어지면 금세 보기 싫게 갈변해 버린다. 추적추적 봄비까지 내리고 나면 떨어진 목련 꽃잎은 볼품없이 아스팔트 길에 눌어붙어 있다. 반면 벚꽃은 지는 모습도, 땅에 떨어지고 나서도 아름답다. 길에 분홍색 자수가 박힌 카펫이 깔린 것만 같다. 활짝 피어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는 모습도 아름다운 꽃, 마지막 모습마저도 눈에 담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은 꽃이다. 눈처럼 내리는 벚꽃잎을 바라보고 있자면 이형기 시인의 「낙화」에 나오는 시구가 떠오른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꽃과 마찬가지로 인간사도 영원한 것은 없다. 사랑도 언젠간 어떤 형태로든 이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별은 아무리 여러 번 겪어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아이유의 '나만 몰랐던 이야기'에 나오는 좋은 이별은 세상에 없다는 가사가 어찌나 공감되던지 한동안 그 노래만 들었던 적이 있다. 아무리 좋게 다독여 잘 헤어진다고 한들, 사랑했던 그 모든 시간과 추억을 끊어내야 하는 과정이 어떻게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모든 이별은 아프고 슬프고 힘들다.


그렇지만 일어나는 일에는 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을 만난 것이 운명이라면, 그 사람이 떠난 것도 결국 운명이다. 시간이 지나고 아픔이 가신 뒤 돌이켜보면 이별했기에 다음 단계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별은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어서 더 좋은 인연을 맞이하기 위한 순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자. 최선을 다했는데도 끝을 피할 수 없다면 그 인연은 거기까지다. 만나게 될 사람이라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돼 있고, 그게 아니라면 내 곁에서 필요한 시간만큼 머물러줬던 사람인 것이다. 떠나는 이의 발목에 구질구질하게 매달리거나 집착하고 붙잡는 것은 사랑했던 시간마저 망치는 일이기에, 끝난 인연은 미련 없이 고이 보내주자. 마지막 모습조차 땅을 곱게 수놓아 발길을 감싸는 벚꽃잎처럼. 세상에 좋은 이별은 없다지만 적어도 후회하지 않을 이별은 존재하지 않을까.


다가오는 봄에는 내 마음도 온통 분홍으로 물들고 싶다.

벚꽃 그늘 아래 손 잡고 걸으며 흩날리는 벚꽃잎을 함께 바라보고 싶다.



벚꽃연무



수줍게 물든 하이얀 두 볼

보드라운 살결과 하늘거리는 속눈썹


봄의 왈츠에 사뿐히 떠안긴 발끝엔

다부지게 매듭지은 연분홍 토슈즈


무대가 끝나고 떠나시는 뒷모습에

텅 빈 마음이 만 갈래로 흩날려도


눈물 대신 환한 미소 봄바람에 아로실어

떠나시는 걸음걸음 고이 수놓아 드리리


순백보다 순결한 분홍빛으로

이 마음 담뿍 담아 보내 드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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