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아버지의 버킷리스트
40대의 아버지는 어느 날 평소보다 더 피곤함을 느꼈다. 감기가 길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축 늘어지는 것이 갈수록 기운이 없었다. '중년이 되니 나도 별 수 없군.' 아버지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어지간한 골초였지만, 자식 셋이 생기고 나서는 금연에 성공했다. 할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당신은 담배를 끊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날 아침 침을 삼키는데 이물감이 있었다고 한다. 기침을 하는데 객혈이 있었다. 피를 본 아버지는 덜컥 겁이 났다. 그때 우리는 막 새 아파트로 이사한 상태였고 나는 드디어 내 방을 가졌다.
아버지는 회사 근처 병원에 혼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의사는 드라마에서처럼 어서 큰 병원으로 가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며칠 후 서울의 종합 병원으로 갔을 때는 이미 폐암 3기가 넘어선 상태였고, 아버지는 삶과 죽음의 문턱에 섰다.
몇 주째 아버지는 병원에 계셨다. 우리 남매는 상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각자의 교복을 입은 채로 며칠에 한 번씩 투덜거리며 아버지에게 문병을 갔다. 그때 우리는 중고생이었고 또래 친구들만을 세상의 전부로 알고 있었다.
부천에서 서울 아산병원까지는 전철을 타고도 한 참을 가야 했고, 성내역에서 보이는 병원은 아득하고 엄숙했다.
물론, 그 모든 것을 증거하고 감내해야 했던 것은 어머니다. 중환자실의 남편과 사춘기의 예민함으로 무장한 자식 셋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을 어머니, 어머니는 어떤 마음으로 그 길을 오갔을까.
몇 개월 뒤 아버지는 항상 계시던 그 자리, 소파 가운데 자리로 돌아오셨다. 아버지 옆구리에 커다랗게 남은 수술 자국을 제외하고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그러나 내가 이 소박한 일상의 기적을 깨닫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아버지는 조금 더 즉흥적이고 다정한 사람이 되었다.
그 후로 "덤으로 사는 인생, 재미있게’를 삶의 만트라로 삼으신 아버지는 온갖 재미난 일들(특히 당구 같은 것)을 꾀하시다, ‘내 버킷 리스트에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가 있다고 선언하셨다. 작년 5월의 일로, 2019년 올해 75세가 되셨다. 이때 오른손을 번쩍 들고 특유의 찰진 ‘나도’를 외친 70세 어머니. 아.. 긍정적 에너지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까....
우물쭈물하다 홀로 중년이 되어버린 나, 42세 장녀는 당황스러웠다.
네, 갑자기요? 버킷리스트요?
시작은 이렇게 막무가내였다. 버킷 리스트라니. 내 아버지에게도 그런 리스트가 있었나. 우리는 예전보다는 대화를 많이 하는 부녀가 되었지만,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말이라는 것이 뱉어지면 제 스스로 힘을 가지는 것인지, 가능할 것 도 같고, 해야 할 것도 같은 자신감과 의무감이 동시에 생겨났다.
게다가 버킷 리스트라니. 청개구리 자식들도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그 단어의 힘이 우리를 모험의 세계로 이끌었다. 모험과 신비가 가득한 그곳, 우리가 꿈꾸던 그곳. 산티아고로 떠나자!
{산티아고 연대기}
2018년 5월 아버지 버킷리스트 선언, 옆에 있던 어머니 제창.
2018년 10월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 일정 극적 합의 도출
2018년 12월 비행기표 구입. 동면 돌입.
2019년 3월 봄이 오고 있다. 주말 15km 하이킹 시작
2019년 4월 아버지 감기로 드러누우며, '너그들끼리 갔다 온나'시전. 주로 여행 일정이 다가오면 시전 됨.
2019년 5월 감기를 어머니에게로 바통 터치 후 아버지 본인은 매일 걷기 운동으로 본격적인 컨디션 조절 시작. 어머니 골골. 그러나 감기 따위가 어머니를 막을 수는 없지.
2019년 5월 21일 로마로 출발 12시간 비행
2019년 5월 27일 산티아고 프랑스길 시작점 입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