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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리 Sep 16. 2020

부동산과 나, 그 10년의 기록(1)

전세 자가 임대 찍고, 전세

독립 선언 

첫 회사 사무실은 서울 강남역 근처에 있었다. 부천에서 통근 시간은 1시간 40분 남짓. 도보-마을버스-지하철 1호선-2호선 환승-도보로 이어지는 출퇴근의 카오스에서, 2호선 순환선을 갈아타는 신도림역은 이 모든 혼돈의 정점에 있었다. 이번 차를 타지 못하면 다음 차는 내 생애에 없다는 각오로 돌진하다. 알겠나. 이 자리다툼의 무한경쟁에서 밀려난 자를 기다리는 것은, 오직 지각. 아침 잠 없는 김 부장씨는 이미 출근 + 1시간. 

 

이후 역삼역, 시청역, 수내역, 삼성역으로 출퇴근 지를 옮겨 다녔는데, 당시 야근과 함께 청춘의 절정을 보내고 있던 나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그저 시지프스의 형벌일 뿐이었다. 몇 시간 후 출근해야 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애써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 영겁의 형벌. 허무하지만 제발 더 자게 해 줘. 


나 대출 얼마까지 해줄 수 있는데요?


당시에는 전세자금 대출을 홍보하는 은행 직원이 수요일마다 회사 로비에 상주하며 대출 영업을 했다. 나도 이제 30대 중반을 향해 가는 어른 인데, 대출 경험이 없어서는 안 되지. 어느 날인가 영업직원과 마주 앉았다. 아, 그렇다. 나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넘겨주고 알게 된 사실은 고작 대출을 받기 전에 먼저 계약할 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요. 저 대린이에요.  


이렇게 나는 "우리 집안이 비록 돈이 없지만, 빚도 없다"라는 것을 큰 자랑으로 삼아오신 아버지에게 대실망을 안겨 드리게 되었고, 부모님은 딸이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나가 사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왜 나가 살려고 하느냐. 이 험한 세상에 여자 혼자 나가 어쩌자는 것이냐." "돈을 모아야 하는데, 그렇게 빚을 져서 어쩌려고 하느냐.", "여자가 혼자 나가 오래 살면 계속 혼자 살게 된다고 하더라... 이 와중에 아버지 예언 적중. 어머니는 "쓰레기 더미 속에 홀로 살아가는 여인" 같은 다큐를 거들먹거리며 딸의 위태로운 위생 상태를 두려워하셨다. 


그렇다. 나는 이렇게 부정적이고 인신공격적인 언사들이 난무하는 가운데에서도 독립을 이뤄낸 것이었다. 


전세 #1 

삼성역 근처 사무실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빌라 8평 원룸 전세. 전세는 보통 2년 계약을 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 3층으로 원룸+베란다+작은 부엌이 있었다. 따로 관리비가 없어서 좋은데 관리가 엉망이다. 이제는 전통 가옥의 전형이 된 체리색 몰딩과 짙은 황색의 데코타일 바닥 인테리어. 나는 그저 내 공간이 있다는 이유로 행복했다.


무서울 것이 뭐가 있냐며 큰소리치고 나왔지만 첫날은 현관문 문고리를 째려보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유난히 공포스러웠던 그 날의 기억이 1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생생한 걸 보면, 참으로 텐션이 높았던 첫 날밤이었던 것이다. 


나는 독립을 하기만 해 봐라 아주 남사스럽게 뜨거운 연애를 하겠다고 벼루고 있었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10년이 지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


전세 #2 

회사를 걸어서 다닐 수 있다는 것은 큰 메리트였다. 거창한 자기 계발의 계획들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밤늦게 까지 꽤 잘 놀았다. 이직과 함께 사무실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빌라 원룸으로 이사를 했다. 전세 계약을 한번 해 봤다고 나는 이미 모든 프로세스에 능숙하다. 


내 집은 빌라 1층. 그러나 이거슨 훼이크. 언덕에 걸쳐 있어서 밖에서 보면 2층 높이에 있었다. 오래된 건물이지만 리모델링을 새로 해서 깨끗했다. 없던 결벽증도 생길 것 같은 화이트 톤의 인테리어. 첫 번째 집 보다 관리 상태는 훨씬 좋았지만 보증금은 더 낮아서 횡재했다. 


임대인은 1929년생 할아버지로 계약 당시에는 당신만 재미있는 라떼 이야기로 나를 무척이나 피곤하게 만들었지만, 크리스마스 때 와인을 선물로 주시던 모던보이였다. 


2012년 겨울, 대통령 선거. 이 집은 박근혜 자택의 도보 1분 거리에 있었던 터라 경찰 경비가 살벌했다. 그리고 선거 당일  딸의 집에 놀러 오신 어머니는 개표 결과 방송을 보다 만세를 외치며 밖으로 뛰어나가셨다. 동네는 그 늦은 시간에도 시끌벅적했다. 다음날 집 앞에 <삼성동 주민 박근혜 님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드린다>는 현수막이 붙었다. 그 이후의 일은 우리 모두가 안다. 


어머니, 제가 이 모든 것을 예상하고 그때 나가지 마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전세 #3 찾던 중 매매

어김없이 계약 만료일이 다가왔다. 4년 동안 원룸형 빌라에 살던 나는 독립된 침실을 갖고 싶었다. 고기를 구워 먹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잠을 청할 수 있는 그런 공간. 내가 진정 너무 많은 것을 원했단 말입니까. 3개월 동안 전세를 찾아 헤맸지만 마음에 드는 집을 찾을 수 없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전세난이 계속되는 가운데 전셋집은 대부분 뭔가 부족했고, 월세는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조급해지고 있을 때쯤 이 집을 만났고, 처음 본 순간 반해버렸다. 통창으로 햇볕이 기가 막히게 들어오는 오래되었지만 깔끔한 방 2개짜리 집이었다. 

이 집은 매매로만 진행합니다. 

집을 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내가 집을 빼줘야 하는 시간은 고작 1-2주 밖에 남지 않았고, 시간에 쫓기는 인간은 잘못된 결정을 내리기 쉽다. 그전에 봤던 전셋집들과 비슷한 가격의 매매가로 마음에 엄청 드는 집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은행 대출을 받기 위해 번호표를 뽑았다. 이윽고 억대의 대출을 받은 나는 무서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드라마에서 차압 딱지가 곳곳에 붙어 있는 장면이나 당시 애정 하던 사채꾼 우시지마의 인물들이 떠올랐다. 나도 이렇게 귀여울 때가 있었군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미 30대 후반이었다. 


그렇게 얼떨결에 부동산이란 것을 처음 가지게 되었다. 


임대 #1 후 집으로 

원래 출장이 잦았지만, 해외에서 6개월 체류할 일이 생긴 나는 집을 그냥 비워 두는 것이 아까웠다. 또 마침 매매한 집에서 2년을 살고 나니 짐을 싸고 싶은 충동에 견딜 수가 없었다. 전세 체질이다. 단촐한 짐을 챙겨 다시 부천 본가로 들어오고 집은 임대를 주는 것으로 결정했다. 


월세가 들어오며 새로운 수익이 창출되는 것은 재테크의 꽃이며, 불노 소득의 핵심 이기도 하다. 됐어! 이제 난 혼자 노년을 맞을 준비가 됐어! 본가에서는 내 방이 없어 거실을 뒹굴며 자야 했지만 불만은 없었다. 원래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이런 시련의 시기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임차인은 나보다 어린 귀여운 신혼부부였다. 그리고 월세는 정확히 3개월 후부터 밀렸다. "저, 혹시 입금하셨는지요?" 조심스럽게 카톡을 보낸다. "아, 예 이번 달도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사업을 시작해서요. 다음 달에 다 같이 넣어드리겠습니다." 당당한 청년 사업주의 풍모다. 


쭈그리인 나는 "아, 예. 화이팅!"이라고 답장을 보낸다. 앗뜨. 빌어먹을 화이팅이라니. 뭐지 이 습관적 화이팅은. 호구가 아닌 강한 모습을 보여야 해. 다음 달에도 그다음 달에도 기다리던 월세는 들어오지 않았다. 강제적 착한 임대인 등극. 신혼 부부는 그새 아이를 낳았다. 


보증금을 까 나가는 형식이 되었지만, 어쩌겠는가. 집에서는 몇 달 동안 트렁크에서 옷을 꺼내 입으며 객식구 신세를 면치 못했고 월세 소득도 없어진 나는 다시 전세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to be continued.  



Photo by Michał Kubalczyk on Unsplash

Photo by Tierra Mallorc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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