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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명희 Aug 01. 2024

동호와 나

'임을 위한 행진곡'이 싫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싫었다. 싫었다기보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다. 그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은 다니던 회사에 노조가 생기면 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의 시작에서 벌써 ‘아. 이건 아닌 데’ 싶다. 부르는 것은 고사하고, 힘주어 제창하는 사람들 사이에 눈길을 어디다 둘지도 모르겠다.  그 음과 가사가 비장해서, 나는 그 정도 마음은 아닌 데 하고 속으로 좋아했다. 내가 그런 처절함을 느끼지 않았음이 위안이 되니까. 노래는 따라 부르지 않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그 노래가 빨리 끝나길 바랐다.


동호를 알게 되었다. 동호의 집 한 켠에 봉제공장 다니는 정미 누나와 단둘이 세 들어 사는 친구, 정대도 알게 되었다. 동호는 정대가 옆에서 군인들의 총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느꼈으나, 무서워서 그 자릴 도망쳤다. 동호가 정대를 찾아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다는 상무관에 갔다. 그러다 자신이 직접 시체를 정리하게 되고, 마지막까지 그 자리를 지킨다. ‘너는…’이라고 시작되는 그 이야기에 나는 빨려 들어갔다. 이야기의 시작에는 분명 어떤 비장함도 없다. 그러다 다음의 글귀에 이르렀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슬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하는데, 마치 나에게 그 소년이 다다다- 오는 것 같았다. 소년이 온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준비가 없어서 마음이 쿵쾅였다. 그 뒤의 글은 이렇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나는 응답하지 못하고 다음 장으로 눈을 옮겨 책을 마저 다 읽고 덮었다.


그때부터였다. 그러고 말았던 나를 기억하게 된 것은. 소년의 온다의 작가는 아버지가 숨겨 놓은 광주에서 가져온 그날의 사진집을 몰래 펼쳐보았을 때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고 했다. 나에게도 어떤 연한 부분이 있어, 소설의 마지막을 읽을 때 그 연한 부분에 무엇이 새겨진 것일까?


2024년 5월 17일 광주에 가게 되었다. 워크보트에서 함께 글쓰기를 하는 김대영(탄탄)이 광주에 518 스터디투어를 꾸려서 가는데, 몇 명 더 함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워크보트에 이야기했다. 혼자는 절대 갈 엄두를 못 내었을 텐데, 함께 가는  워크보트 멤버가 있어 광주에 갈 결심이 되었다. 광주송정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518 민주묘역으로 향했다. 동호의 묘를 먼저 보고 싶었다. 참배광장을 지나, 518 민중항쟁추모탑 뒤 펼쳐진 묘가 많았다.  1 묘역만 해도 778기. 그 가운데서, 동호를 찾아야 했다. 그런데 그 이름은 본명일까? 그제야 너무 안일하게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역 한가운데에서 서성이고 있다가, 바로 옆을 지나는 어느 해설사의 설명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만났다. 동호를. 작가의 말대로 앳된 얼굴의 영정사진. 1964년 6월 5일, 연도는 달라도 내 동생과 같은 날 태어났구나. 1 묘역의 대부분은 1980년 5월 21일 거의 비슷한 날 죽었다. 보름이 모자란 16년을 살다가 간 소년, 나는 이제 소년의 얼굴을 안다. 그 시절, 이 묘를 슬픔으로 안았을 가족이 있었다는 것도.


"우리의 마음에 눈물을 주고 너의 가슴엔 한을 남긴 이승의 못다 이룬 서러운 인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다시 만나리" <문재학의 묘비문>


금남로로 향했다. 518 행사로 도로가 통제된 금남로 앞에서 택시를 내려, 옛 전남도청 앞 분수대를 걷고, 막국수를 먹고 전일 빌딩을 둘러보고 옛 도청자리의 아시아 문화전당을 구경하고, 커피를 사 마시고. 해야지 싶었던 일을 하고 나니, 에너지가 달려 전야제 행진은 자연스레 참여하지 않았다. 눈부시게 화창하고, 은근히 더웠던 날이다. 일행과 맥주와 치킨으로 저녁을 대신했다. 봄, 저녁의 선선한 바람을 기대하고, 날이 어스름 해질 즈음 금남로에 섰다. 그때도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날이 슬슬 더워지는 참이었겠다.


"저 그저 도청 안에 들어갈 적에 한 말을 시방까지 잊을 수가 없어라. 그놈아가 저 도청 안에 들어가면서 그럽디다. '억울한 사람, 억울한 죽음 없어야 되지 않겠소, 엄니...'

......

그런데 내 새끼 보고 자퍼 죽겄어. 어디 가서 찾을 수 있을까이. 어디 가야 있을까이"


금남로에 쩌렁쩌렁  누군가의 ‘엄니’ 역할을 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울렸다. 목소리를 내는 배우를 눈으로 찾았지만 안 보이던 그때, 1980년 광주가 성큼 나에게 왔다.  동호도, 엄니의 그 놈아도 죽을 수 있을 것을 알면서도, 진짜 그 무서움 속으로 나아갔던 것이었구나. 그러나 그 마음은 이토록 평범한 마음이었구나. 그 마음이 처음부터 어떤 의지였던 것이 아니라 느낀다. 같이 놀던 한 친구에 대한 의리, 함께 일하던 동료의 억울함, 일상 살다가 어떤 큰 힘이 부당하게 내 곁에 또는 나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 내게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 마치 바이탈 사인 같다. 살아 있다는 증거.


나지막이 노래가 시작되었다.


"금남로 걸어오는 꿈에서 나눈 약속. 봄바람이 데려오는 그대를 만나 멀리서 들려오는 총탄소리가 선명해도. 그때처럼 서있을 게. 여기에 서 있을게. 오월 하얗게 그리워 한 너를 기다릴게. 오월 푸르게 살아오는 너를 기다릴게.” [오월, 기다림 - 오월 어머니]


그렇지, 그렇구나 하고 한 손으로 영상을 찍으며 그래도 삼킬만한 눈물을 떨구며 있었다. 노래가 나오는 곳을 뜻 없이 쳐다보는 데, 어라 노란 옷이 보인다. 그 옆에 보라 옷이 보인다. 긴 행렬의 첫 사람의 표정이 보인다, 걸음이 보인다, 깃발을 든 손이 보인다. 그다음 사람도, 또 그다음 사람도 선연히 내 앞으로 온다. 그리고 이내 지나간다.


나는 엉엉 울고 말았다. 같이 간 아이들은 창피해하고, 같이 간 최지영(졍)도 울고,  모르는 사람은 혹시 세월호 유족이냐고 물었다.


"아니요."


재빨리 눈물을 닦아내려 하기보다, ‘나에게 와서요...’라고 답을 더했어야 했다.


온다. 내가 덮어버린, 응답하지 못한 부탁이 다시 나에게 온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여전히 소년은 그 부탁을 들고 있다.


나는 운다. 전 보다 더 운다. 울고 털어버리면 안 되는데, 세상 떠내려가는 것처럼 더 운다.  우리 중 518 어머니들이 노랑과 보라의 유족들을 맞는다. 1980년 5월 18일 이후, 꿈에도 원치 않았을 희생자 어머니가 된 한 사람이 세월호, 이태원참사 피해자의 곁을 지키고 있는 유가족에게 말한다. 난 이게 44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으니, 당신이 이러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힘내십시오. 힘내십시오.”


세월호 참사 10년 약속의 자리를 지킨 피해자와 연대자 이야기를 쓴 ‘기억의 공간에서 너를 그린다’에 안미선이 쓴 곽수인 엄마 김명임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저는 고등학생 때 광주 전남대 정문 앞에서 살 았어요. 5.18 민주화운동 때 내 가족을 잃진 않았지 만 이웃집에서 두 명이 희생됐어요. 그때 저는 고등학생이었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지나갔어요.

세월호참사를 겪으면서 '아, 내가 잘못 살았나?' 하는 의구심이 제일 많이 들었어요. 5•18 때는 학생이었다 해도 그 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세월호참사가 일어나지 않고 더 많은 아이들이 구조될 수 있지 않았을까? ……. 이태원참사가 났는데 우리가 다시 2014년 4월 16일, 그 막막했던 때로 돌아간 것처럼 느껴졌어요……. 우리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는데 시간이 흐르니까 그냥 탁 던져놓은 것처럼 여기에 있는 건데, 저 유족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요? 그 사람들 걱정도 되고……사람이 오래 살면 여러 사건을 겪을 수는 있어 요. 하지만 참사가 되풀이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정말 비숫하게, 똑같은 희생이 되풀이되는 거거든요. 그런 참사가 자신의 일이 되기 전에 시민 의식과 연대 의식을 바짝 날 세우고 챙겨야 해요. 사회적 재난은 대비하고 막을 수 있어요. 관심을 가지고 나와 가족, 이웃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깨어 있는 정신으로 저희와 함께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518 민주묘역엔 현재까지 986기의 무덤이 찼고, 세월호 참사 305명, 이태원 참사 159명이 죽었다. 엄니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 동호 같은 친구를 가진 사람, 소중한 사람의 억울함, 부당함의 고통에 반응한 사람들은 비장하다. 이내 그 소중한 사람들이 내게도 이어진다.  나에게 소년이 왔다. 나는 이제 소년을 내 곁에 둔다. 과거의 너를 내 곁에 둠은 미래의 나와 내 소중한 사람들을 향하는 것임을 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줄까? 너는 그 노래를 어떻게 생각할까? 너 역시 나처럼 그 노래가 뻘쭘했을까? 이제 우리 서로 한 손을 들어 구령을 맞추며 힘주어 부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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