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 땐 걸으라고?

어느 날 고아가 되었다 #13

by 마릴라 Marilla

힘들거나 마음이 복잡할 때 햇빛을 보고 걸으라고 조언하는 사람과 책이 많다. 생각이 단순해지고 마음이 차분해져서 분명 도움이 된다고. 물론 그건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사고구조와 성향이 다르듯 산책이 모두에게 대안일 수 없다. 걷는 건 몸이지 마음이 아니어서 걷는 속도와 시간만큼 머리는 문제에 더 깊이 빠져들고 매몰되기도 한다. 생각이 많고 복잡하고 민감한 사람은 큰 도움을 얻지 못한다. 여러 번의 경험에서 한 번도 나아진 경험이 없었지만 그 효과가 있는 날이 오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날씨는 봄이고 꽃은 만발하니 그 따뜻한 기운에 기대 보려고 천변을 속보로 오래 걸었다. 사람이 없는 조용한 길을 걷는 동안 괴로운 생각에서 1만큼도 멀어지지 못했고 괴로움의 시계는 걸음수만큼 돌았다. 벤치에 앉아 눈은 꽃을 바라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문제와 관련된 부정적인 상상이 끝도 없이 이어져 힘든 사람의 생각이 어디까지 깊어지는지 원치 않는 체험을 하게 되는 순간이다. 죽기 전에 빠르게 지나간다는 주마등처럼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잊었던 기억이 정밀하게 올라왔다. 일찍 철든 아이의 성장동화가 복수심에 불타는 여자의 분노로 장르가 바뀌는 과정을 보게 된다. 생각하지 않으려 걸었는데 원치 않는 생각들이 뭉쳐 걷는 길 위로 나쁜 생각들이 뿌려졌다.


머릿속으로 열쇠업자를 불러 현관문을 열고 아무도 없는 집에 찾아가 내가 산 물건들만 훼손하는 그림이 자동 플레이 되었다. 망치로 TV와 컴퓨터 모니터를 깨고 탁자 다리를 자르고 냉장고에 망치질을 하고 온열매트를 찢고 이불과 옷과 가방을 모두 가위질해서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장면이다. 훤히 아는 집이어서 시각화가 쉬워선지 롱테이크로 한 번에 연결되었고 그 장면이 순간 통쾌하다고 느꼈다. 그러다 이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자각과 실행하지 못할 상상이라도 거기까지 갔다는 생각에 더 힘들어졌다. 단순한 성향의 사람이 아니면, 복잡하고 섬세한 사람이라면 힘들 때 걷거나 자연 속으로 휴식하러 가는 건 오히려 독일 수 있다. 오히려 사람이 많고 사방으로 정신분산이 가능한 도시 한복판으로 나가야 한다. 다양하고 휙휙 지나는 것들에 시선을 팔고 체력 소모를 해서 마음이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지금 내가 힘든지 고민 있는 사람인지 생각나지 못하게 그 속에 섞여 있어야 한다. 그게 오히려 나은 방법인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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