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고아가 되었다 #14
나는 자전거를 잘 탄다. 자전거를 처음부터 혼자 탈줄 아는 사람은 없고 앞에서 페달을 밟으면 누군가 뒤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도움을 통해 넘어졌다 일어서는 두려움의 과정을 지나 터득하게 된다. 뒤에서 잡아주는 역할은 보통 아빠이거나 오빠이거나 남자친구처럼 남성일 확률이 높다. 난 6학년 때 자전거를 배웠는데 뒤에서 잡아준 사람은 보호자가 아니라 동성 친구였다. 그 친구는 스스로 넘어지면서 자전거를 배운 뒤 나에게 방법을 알려주었다. 어린 여자에게 자전거를 배우는 것도 흔치 않지만 혼자 자전거를 배운 초등학생도 남다르지 않은가. 가족까리 잘 아는 그 친구 얘기를 하자면 나이보다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였다. 딸부잣집 장녀였는데 자식 계획이라기보다 아들을 낳으려다 딸만 넷이 된 것이다. 부모는 성실했고 재산도 있었으나 원하는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딸들을 사랑하지 않았고 지원하지 않았다. 맏딸이니 언니 역할은 주어지면서도 사랑은 받지 못한 아이였다. 환경은 아이를 혼자 크게 한다. 바르고 똑똑했으나 부모 관심밖의 아이는 청소년기에 탈선을 했고 성인이 되어서는 가족을 등졌다. 지금은 연락이 끊겨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없지만 방황의 시간이 있었더라도 그 친구가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거라 믿는다. 초등학생인 내 눈에도 그 친구는 범상치 않았고 기본만 해줘도 알아서 잘 될 아이라 여겨졌지만 그 부모는 관심이 없었다. 부모로 인해 방황을 했더라도 자기를 돌볼 힘이 생겼을 때 현명하게 자기 삶을 살기 시작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친구와 내 인생의 기로는 그때부터였는지 모른다. 가끔 KBS 다큐 <동행>을 본다. 그 방송에 나오는 아이들의 공통점은 투정이 없고 철이 일찍 들었으며 자기 절제를 한다는 점이다. 폐지 줍는 할머니를 대신해 돈이 되는 공병을 찾아다니고, 퇴근이 늦은 엄마를 위해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한다. 우울증으로 방에 갇힌 아빠를 위해 식사를 챙기고 발이 자라 운동화가 작아도 뒤축을 구겨 신으며 사달라는 말을 하지 않고 알아서 빨리 돈을 벌수 있는 곳으로 자기 진로를 정한다. 주변에서 자녀가 착하니 얼마나 좋냐고 쉽게 말하지만 나는 그 아이들을 보며 지금의 나처럼 훗날 공허해질까 슬펐다.
어릴 때부터 자기 욕구를 표현하지 못한 아이들은 커서도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불편한 환경에서 자랐으니 가족이나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그것이 자기 인생의 성취로 대체되는 것이다. 방송에 나오는 아이들은 전국에서 관심과 지원을 받고 열심히 살아갈 동기가 되니 나은 상황일 수 있다. 사람들은 가끔 편부모나 조손가정, 자립준비청년처럼 일찍부터 부모가 부재한 이들을 비교군으로 삼아 부모밑에서 자랐으니 좋은 삶이 아니냐고 말한다. 그들은 일찍 결핍을 알고 살아가지만 부모와 살아 온전해 보이는 자녀에게 어떤 심리적 부재가 있는지 알기 어렵다. 자전거를 알려주던 친구와 나는 부모가 있는 보통 가정의 아이였다. 친구의 부모는 자녀에게 욕설을 했지만 우리 부모는 고운 말을 썼다. 그 부모는 성실하게 일해서 돈이 있지만 자식을 가르치지 않았다. 나의 엄마는 열심히 살았지만 요령이 없었고 약자였다. 그 친구가 비뚤어질만한 이유도, 내가 다큐 속의 아이들처럼 애어른으로 살게 되는 이유도 있는 것이다. 인생전반에 걸쳐 분리조차 힘든 유착상태가 되면 나중에 현실을 알게 된다 해도 완전하게 분리하기 어렵기에 지울 수도, 지워지지도 않는 팽생의 애증과 상처로 남게 되는 것이 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