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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바다거북 May 06. 2023

간결한 삶

얼마 전에 어느 여배우의 패션을 주제로 한 유튜브 영상을 보았는데, 영상 콘텐츠 자체보다는 그 속에 비친 그녀의 태도를 좀 더 인상 깊게 보았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한다는 건 어떤 것을 입을지를 선택하는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것을 입지 않을지를 선택하는 일에 더 가깝다는 인상이었다.


변호사로서의 연차가 쌓이면서, '전문분야 등록을 고려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그것에 대한 답변은, 전문분야라는 게, 어떤 분야를 선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분야를 배제하는 일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고. 그래서 조금 조심스럽다고.


결국 패션이든, 직업 영역이든, 다른 어떤 삶의 양식이든, 같은 맥락일 것이다.

자신만의 결을 구축하려면, 가려서 취해야 한다. 의도하지 않은 것들은 배제해야 한다.



나이가 들고 소화력이 약해지니, 구태여 식당 같은 곳에서 이벤트나 설문에 참여하고 서비스를 받는 일이 없어졌다. 애초에 주문할 때부터도 세트 메뉴를 고려하기보다는 단품을 주문한다.

꼭 먹을 것이 아니라도, 무언가를 덤으로 준다는 제안을 수락할 때보다 거절하는 때가 더 많아진다.

“소액을 추가하시면 이것을 덤으로 드려요” 식 마케팅의 함정은 덤을 받는 것이 무조건 이익이라는 점을 당연한 전제로 접근해서, 소비자로 하여금 그 덤이 정말로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숙고할  기회를 주지 않는 데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요즘은 이익을 떠나 오로지 스스로의 필요를 중심으로 생각한다. “경제적 이익” 이 아닌  “주관적인 필요” 중심으로 사고가 전환된 것은 큰 패러다임의 변화였다. 경제적 이익은 타인에 의해 공여되는 것이므로, 그것을 중심으로 사고하면 언제나 외부에서 제시되는 조건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반면 스스로의 필요와 욕구에 집중하면 굳이 휘둘릴 이유가 없다. 필요하면 값을 치르고, 불필요하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그런 태도가 나올 수 있는 토양이 “부요함”에 있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다.

재고 따지지 않아도 얼마든지 원하는 것을 취할 수 있을 정도로는 넉넉한 주머니 사정.

한 푼 두 푼, 아등바등 아끼고 살지 않아도 스스로의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을 만큼은 재화가 충분하다는 믿음.


다만 “부요함”에 대한 감각은 다분히 주관적일 수 있다.


사회초년생일 때보다 지금 두 배 이상을 벌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덕분에 아등바등 손익을 따지지 않으면서 살 수 있는 것일 게다. 그러나 실제 지출규모를 따져보면 오히려 사회초년생일 때보다 지금 훨씬 덜 쓴다.


일종의 아이러니다. 언제든 충분히 좋아하는 것을 취할 수 있다는 여유가 있으면 구태여 100% 만족스럽지 않은 대체품으로 곁을 채우지 않게 된다. 대체품을 찾기 위한 고생스러운 시간낭비도 없다. 덕분에 이전보다 훨씬 간결하고 단순한 삶을 산다.


이런 삶을 살아보니, 어린 날 나름대로 합리적인 소비를 하겠다고, 물건을 찾아 헤매던 노력 자체가 오히려 불필요한 욕망을 더욱 자극해 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욕구를 실현할 가능성이 채워지면 실제로 그 욕구의 실현 여부-무언가를 소유하고 말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구가 좌절되어 대체품을 찾기 시작하면 그 욕구는 만족 없이 대체품에서 대체품으로 끝없이 옮겨 다닌다. 요컨대 할 수 있지만 안 하는 것과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건 다르다는 것. 덕분에 요즘은 욕구를 별로 참지 않고 그때 그때 원하는 걸 다 소비하면서 살아가는데도, 실제로 지출하는 금전의 규모는 크지 않다.



사실, 사회초년생일 때도 객관적으로 소득이 적진 않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살 수 있을 정도로는 벌었다.

매월 통장에 찍히는 월급 많이 달라진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스스로의 주머니 사정을 다하는 태도를 바꾼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교적 어린 나이부터 돈을 벌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고소득자들이었다. 사업가들이나 자본소득만으로도 먹고사는 사람들을 논외로 하고, 주된 소득의 원천이 근로소득인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돈을 잘 버는 축에 속하는 사람들. 관찰해 본바, 그들이 자기 소득에 만족하고 경제적인 손익의 개념으로부터 자유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얼마를 벌든, 그 소득규모에 맞게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소비규모라는 것이 있었고, 그러니까 돈은 늘 부족한 것이었다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소비의 규모”

그게 문제였다.


남들이 먹는 것, 입는 것, 가는 곳, 나도 먹어보고 입어보고 경험해 보려면 당연히 돈이 든다.

하지만 모두가 소비하는 것을 나도 당연히 소비해야만 하는가? 그것이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이었던가?


20대엔 내 것이 아닌 욕망으로부터 많이 휘둘렸다. 남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혹은 남들의 욕망에 참여하기 위해 쓸 곳이 너무 많았다. 대체품을 찾아 헤매는 소비패턴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남의 욕망에 줏대 없이 흔들리는 삶이었다.

어떤 것들은 문화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와 숨 쉬듯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필요한가?’ 혹은 ‘원하는가?’를 스스로 질문해 볼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내 것이 아닌 욕망을 구분하고 거절할 수 있게 되자, 삶이 한결 더 단순해졌다.

타인과 같은 것을 욕망하려 애쓰는 일은 굉장한 눈치가 필요한 일이자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내가 정말 원하지도 않는 곳에 자원을 할당하느라, 내가 정말 원하는 것에 할당할 자원을 양보하는 것 역시 미련한 짓다.


부요함이라는 게 욕망의 크기보다 소득의 크기가 더 클 때에 느낄 수 있는 감각일 텐데, 내 경우에는 소득의 증대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변한 건 오히려 욕망 쪽이었다.

어떤 분야의 욕구가 줄어들고 말고 할 것 없이, 사회문화적으로 당연히 주입된 어떤 영역이나 분야가 통째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더 이상 소비하지 않기로 한 품목들이 있다. 절제가 필요해서라거나, 어떤 신념적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어느 날 나에겐 그런 물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뒤늦게 깨닫거니와, 내 인생은 그다지 유지비용이 많이 필요한 인생이 아니었다.

끌어야 하는 유모차가 있는 인생이 있다면, 바퀴만 잘 굴러가면 그만인 인생도 있는 법이다.



이런 삶의 결이 퍽이나 만족스러워서, 나이를 먹을수록, 삶의 군더더기를 지우는 일에 더 집중하게 된다.

무엇을 더 덜어낼까,

무엇이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뒤집어쓴 허세와 형식일까, 를 생각해 보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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