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 본성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내지요. 자화상에 대한 변론이나 밖으로 보이는 태도, 또는 그 삶의 모습보다 더 깊은 곳에 사는 '안사람'을 바라보게 합니다.
‘천성’이라는 말과 ‘태생’이라는 말이 있듯이. 외모나 삶의 방식이 바뀌더라도 그 사람 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본성은 쉽게 바꿀 수도 바뀌지 않는다는 말에 공감이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한 단어가 어떤 단어와 짝을 이루고 있는가에 따라 의미와 뜻이 달라지기도 하고 그 쓰임새가 변하기도 하다가 기어이 존재가 완전히 바뀌게 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예컨대, 어떤 병이나 통에 술이 담기면 술병, 혹은 술통. 물이 담기면 물병이나 물통. 꽃이 꽂아지면 꽃병. 쓰레기가 담기면 쓰레기통이 되듯. 병이나 통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만 그 쓰임새가 바뀌더니 어느 날 '그것'으로 기억되고 '그것-자체로' 남겨지듯이.
질그릇 같은 사람 속에도 무엇이 담기고 어떤 것이 꽂히는가에 따라 한 존재의 삶이 변하다가 마침내 그 인생이 바뀌기까지.
# 내 안의 두 얼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그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 이야기입니다.
12제자의 심리와 성격을 가장 완벽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 그림은 밀라노 대성당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Chiesa di Santa Maria delle Grazie)의 식당 벽에 그려져 있지요.
최후의 만찬. 숭고한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나 면밀하게 연구된 원근법의 표현, 해부학과 골상학에 입각한 인물의 묘사. 색조의 조화, 풍부한 상징성과 생생한 서사, 우아한 선과 동작의 표현 등 어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벽화입니다.
다빈치는 그 역사적인 순간을 벽에 옮겨놓기 위해. 완벽한 ‘최후의 만찬’을 위해 10년간의 연구와 치밀한 준비를 하고, 작업 시작 3년 만인 1498년 작품을 완성하게 되는데요.
다빈치는 벽화를 완성하기 위해 두 가지 독특한 시도를 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첫 번째로는 실제 인물들을 길에서 그려보고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특히 인물 작품을 그릴 때는 모사보다는 그 사람의 생활과 그의 인격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평소의 생각을 고수했던 다빈치의 열정을 짐작해 볼 수 있지요.
두 번째로 다빈치는 해부학적 시도 후, 두개골을 연구하고 그 형태에 따라 제자들의 생김새를 결정했고 하는데요. 그래서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빈치가 가장 표현하기 힘들었던 인물은 예수와 유다였습니다.
미술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년 7월 30일 - 1574년 6월 27일)가 '신이 선택한 천재'라고 격찬했던 다빈치이지만, 인간 세계에 온 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걸맞은 만족한 표현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다빈치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델을 찾기 위하여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성전 한구석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한 청년이 있어서 다빈치가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예수 그리스도와 흡사한 점이 많았습니다.
평화로운 모습과 자비로운 인상, 어디엔가 위엄이 있고 눈에는 빛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빈치는 이 사람을 데리고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델로 그렸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 그는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인물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유다는 자주 나오지 않지만, 얼마 되지 않는 구절에서조차 유다는 돈을 훔치는 도둑이며 사탄의 영향을 받은 악마로 등장합니다.
다빈치는 역시 유다의 모델을 찾던 중 어느 날 술집에서 술에 만취한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밀라노의 감옥에 갇혀 있던 그가 유다의 모델이 되기에 흡사한 점이 많아 보였습니다.
눈에는 살기가 흐르고 얼굴 표정에는 욕심이 넘치고 있었으며, 행동을 보니 꼭 돈에 미친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다빈치는 그를 유다의 모델로 그리게 되는데요.
그림을 완성하고 난 후, 왠지 예수 그리스도와 닮아 보이는 유다의 얼굴이었습니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놀랍게도 유다의 모델이었던 그 사람은 몇 년 전 성전에서 기도하던 청년이다고 하지요.
이 이야기의 신빙성 여부를 떠나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에 주목하게 됩니다.
# 탈바꿈
존재의 본성으로 회귀, 혹은 탈바꿈.
병이나 통의 본질과 기능은 그 안에 채워질 것들을 담고 보관하고 운반하는 것이지요.
사실 병과 통이 변한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 모습의 변화, 삶의 변화, 존재의 변화는 분명 있었습니다.
변화라는 말을 사람에게 대입해보면 변화는 사람이라서 더 쉬워 보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사람이라서 더 참 고되고 힘든 것이 되지 않을까. 사람의 일이라서 더 어렵고 복잡해지고 난감해지는 일이 아닐까.
# 속 사람의 바뀜
지금 그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일을 하고 있나요. 그대는 무슨 꿈을 꾸고 무엇을 바라보고 있나요. 지금 그대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지금 그대는 어디에서. 누구랑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지금 그대는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생명은 무엇이나 진실하고 꾸밈없는 사랑을 느끼고 만났을 때, 그이(그것) 안의 생명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가 오고 따뜻한 숨결이 쓰다듬던 날. 입 없는 콩에게서그이의 심장이 뛰고 있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요.
죽은 것 같았고, 그 심장이 이미 멈춘 줄 알았던 매화나무 가지에서 어느 날. 스포츠카의 심장소리가 들리고 맹수가 거칠게 포효하듯 꽃망울이 대롱 매달렸을 때. 왈칵, 눈물이 가슴을 저미던 기억이 있지요. 반갑고 기쁘고 설레던 그때, 그 꿈틀거림은 분명 내 안의 움직임이었습니다.
내 안에도 꽃이 피어나고 있었지요.
# 사랑의 변화
1100명 생명을 살린 '쉰들러 리스트'. 나치 당원이자 방탕한 삶을 살았고 돈밖에 몰랐던 오스카 쉰들러. 그가 변했습니다.
인간의 가치에 대한 변화와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에서부터 생긴 변화가 생명을 살리는 리스트를 만들게 했지요.
인간의 실존 방식. 소유를 향한 삶인가? 존재를 향한 삶인가? 소유를 향한 애착인가? 존재를 향한 사랑인가?
"소유를 지향하는 실존은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소유하는 것에 삶의 이유를 두기 때문에 인간의 탐욕이 그 삶을 지배하게 된다.
인간의 본질을 소유하는 것에 두기 때문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무가치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나의 소유가 곧 나의 존재가 된다면 나의 소유를 잃어버렸을 경우에 나는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인가.
그러나 존재 지향적인 실존은 기쁨을 함께 나눈다는 인간의 가장 깊은 체험을 타인과 함께 나누게 된다.
한 인간의 사랑과 감탄을 공유하는 것만큼 또는 어떤 사상이나 음악, 그리고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만큼 인간을 가장 의미 있게 만들고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당신은 어떤 실존의 삶을 살기 원합니까." (참조: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중에서)
사람은 사람이기 이전에 사랑입니다. 육적인 존재이기 이전에 생각하는 존재이고 영적인 존재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