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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Jul 18. 2021

잔서완석루

늙어간다는 것의 의미

아직 잠이 덜 깬 붓을 부벼 추사 선생의 정신을 그려본다


# 늙어간다는 것의 의미


어느 사진작가가 중견 여배우의 사진을 찍게 되었는데요. 그가 평소에 너무나 좋아하던 여배우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혹시 자신이 찍은 사진이 여배우에게 누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최선을 다해서 촬영했고 심혈을 기울였지요.


이윽고 사진 촬영이 끝나고 작가는 여배우에게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제 얼굴에도 주름이 가득 보이네요.” 사진을 한 장씩 한참 동안 바라보던 여배우의 말이었습니다.


사진작가는 '여배우가 얼굴의 주름을 마음에 안 들어하고 있구나'하고 짐작하고는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름은 깨끗이 수정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여배우는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뇨, 수정하지 마세요. 저는 제가 가장 아끼는 지금의 얼굴을 얻는 데 평생 걸렸거든요.”


# 낡고 주름진 친구, 나


오랜 세월, 함께 울기도 하고 또 웃기도 하며, 인생의 생. 노. 병. 사를 같이 살아온 소중한 벗들.


그 벗 중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벗을 손가락으로 꼽으라면 나는 나 자신을 가장 먼저 앞세우고 싶다. 때로는 큰 키에 준수한 용모,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이들과 날 때부터 금수저를 쥐고 출발한 이들이 한없이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만만치 않은 세상, 모진 비바람 가운데서도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갖가지 오해와 비난 가운데에서도 나는, 그 누구보다 내 생각과 마음을 이해해주었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내가 그동안 지어온 허물과 죄는 또 얼마나 많은가? 살아내고 버텨온 만큼, 때도 많이 묻었고 닳았으며 낡았다. 그런데도 나는 나를 묵묵히 지켜주고 있고 다독여주고 있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여 볼품없이 주름지고 깨진 낡은 나. 그 주름진 흔적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온전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까?        


# 수정하고 싶은 내 안의 편집자


그러나 자기 자신을 수정하고 싶고 보다 더 나은 자기로 변화되고 싶은 하는 것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와 욕망이 아닐까?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내가 지금의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껴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내가 나를 지금 이 모습 이대로 인정해주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특히 남들에게 보이는 피상적이고 사회적이며, 경제적인 시각에서 지금의 나를 '있는-그대로', '지금-그대로' 사랑하기란 만만치 않은 정신적, 감정적 노동을 필요로 한다.


# 잔서완석(殘書頑石)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비바람에 깎인 볼품없이 깨진 빗돌(비석,碑石)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몇 개의 글자"


잔서완석(殘書頑石). 추사가 제자 유상(柳湘,1821~?)에게 '금석문 연구와 서법書法에 정진하라는 의미로 써 준 글이라고 한다.


학자들은 그의 글에서 전서와 예서, 해서, 행서의 필법이 함께 녹아있다고 하며, 제주도 유배후 강상(강변) 시절의 대표작으로 손꼽는다.


모든 글씨가 위쪽에 정연하게 맞춰져 있지만,  거기서부터 아래로는 자유롭다. 유홍준 교수는 그의 글씨가 빨랫줄에 걸어놓은 듯하다고 표현했다.


옛 법칙과 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자유롭다. 오래되고 인적인 드문 예서(隸書)와 전서(篆書)라는 두 갈래 길을 새롭게 바라보고 해석한 것이다.


이윽고 기본과 기초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창조적인 추사의 시각은 그의 붓이 새로운 길을 걷게 했는데, 해서(楷書)와 초서(草書)의 운필법(運筆法)을 자유롭게 섞어 쓴, 그 품새가 마치 노래하듯 춤을 추 듯하다.


한 자 한 자가 제 마음대로 흥얼대는 것 같다. 하지만 낱낱의 글자들은 뜻과 도를 벗어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단단히 지켜주고 있다. 변화 속에서 조화와 균형을 잃지 않은 뜻이다.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거친 붓질은 희끗희끗 비백(飛白)을 드러내며, 낡은 비질처럼 허술해 보이지만 붓끝에 배어있는 힘은 바위를 뚫을 다.


장중하면서도 무겁지 않고 활달하면서도 고요함을 느낄 수 있는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비바람에 깎인 볼품없이 깨진 빗돌(비석,碑石)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몇 개의 글자"라는 의미가 추사의 붓 끝에서 우러나왔다.


낱낱의 글자들은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을 한 사람의 인생을 지고 있다. 추사의 영혼이 지고 있는 인고(忍苦)의 무게를 머금은 채.


#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비바람에 깎인 볼품없이 깨진 빗돌(비석,碑石)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몇 개의 글자가 있는 다락(곳)"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이 고집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가 장소가 아니고 눈에 보이는 어떤 곳이 아니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잔서완석이 있는 '루(樓)'가 하나의 인격체를 의미하는 상징적인 '루(樓)'라면, 추사의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라는 글자와 의미는 추사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있고, 또 제자 유상의 미래가 될 수 있고, 또 그의 글을 소중히 여겨줄 먼 미래의 어떤 이가 될 수도 있다.


오래되고 낡은 것을 수정하고 싶고, 새 것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을 추사의 글을 보며 다시 추스른다.


'잔서완석'과 다르지 않을 나(樓)와 너(樓)를 사랑으로 마주할 수 있기를 기도하며.


-즐겁고 행복한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는 일광 바닷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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