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길

노란 나비

by 진동길



한 영감의 낡은 차가 신작로를 따라 모퉁이를 막 돌아설 즈음 이장이 한 영감의 차를 다급하게 불러 세웠다. 마을 이장은 갓예순이 넘은 여자였다. 뭇남자들보다 덩치도 크고 투박한 외모지만 마음은 봄볕처럼 따뜻하고 자상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고 동네 일이라면 자기 일보다 먼저 발 벗고 나서는 성격이었다.


"안녕하세유. 영감님. 읍내에 가시는 길인가 봐유.., 월래 마리오도 할아버지랑 함께 읍내에 가는 길이냐."


"네. 안녕하세요. 이장 할머니. 할아버지 따라 목욕탕에 가는 길이에요." 차에서 내린 마리오가 공손하게 인사하며 말했다. 마리오에게 이장님은 외할머니 같은 분이셨다.


"옛다. 이거 받아라." 거친 자갈밭 같은 이장의 손에는 눈깔사탕 다섯 개가 들려있었다.


"내가 마리오 만나면 주려고 그저께부터 주머니에 넣고 다녔단다."


"와!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마리오의 눈빛이 금세 반짝이며 밝아졌다.


"허허허. 매번 이렇게 어린것을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영감이 사탕을 받고 좋아하는 마리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겸연쩍게 웃었다.


"근디. 영감님. 김 씨한테서 그 소식 들으셨지유." 이장이 한 영감의 옆에 딱 붙어 선 마리오를 의식하며 슬쩍 화제를 돌렸다.


"마리오. 이장님 하고 잠시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너는 이장님께 먼저 인사드리고 차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래?"


"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저도 눈치가 있거든요. 그럼. 이장님. 안녕히 계세요. 사탕 잘 먹겠습니다." 마리오는 사탕 한 개를 까서 입에 넣으며 한 영감의 낡은 차에 올라탔다.


시골에서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해도 금세 동네에 소문이 퍼진다. 소문이 돌고 돌다 보면 별일 아닌 작은 일도 큰 사건으로 변하는 일도 있었지만 작은 시골 마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대부분의 일들은 곧 이장의 귀에 들어가 되고 이장의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이번 일은 이장의 성급한 판단 때문에 일이 커져버렸다. 마침내는 이장이 직접 나서서 마무리짓기에는 까다로운 일이 돼버렸다.


"어떻게 한데유. 제가 이것저것 살피지도 않고 여기저기에 소문을 내버리고 파출소에 신고까지 하는 바람에 일이 커져버렸으니... 정 씨를 파출소에 신고한 사람이 저라는 걸 신부님이 아셨을 텐디... 저한테 무척 실망하실 텐디... 이번 주일에 어떻게 신부님의 얼굴을 뵌데유. 또 동네 사람들은 저를 두고 무슨 말을 할지. 이웃을 함부로 판단하고 소문내는 입 싼 여자라고 말하지나 않을지 참 말로 걱정이예유." 마리오가 자리를 뜨자마자 이장이 다짜고짜 속에 담고 있던 말을 쏟아 놓았다.


"이번 일은 이웃지간의 신뢰의 문제인데... 이장은 이장대로 할 일을 한 것이니까 신부님도 다 이해하실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서로 오해한 일이니. 사실 정 씨가 김 씨 농장에서 몸을 맡기고 일을 하고 있지만, 그 사람이 그런 나쁜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이장님도 잘 알고 계셨잖아요. 또 신부님이 농장 일을 맡길 사람을 아무나 함부로 추천해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하지만 어쩌다 보니 서로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오해가 생긴 일이니 신부님도 다 이해하실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맘 편하게 먹어요." 한 영감은 조금 전에 김 씨에게 했던 말을 이장에게도 거의 똑 같이 했다.


"영감님도 아시겠지만 저도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유. 김 씨가 사색이 되어가지고 와서는 다짜고짜 돈이 없어졌다. 정 씨가 돈을 가지고 도망친 것 같다. 오백만 원이 넘는다. 그라고 하니... 또 그 돈이 농협에서 빌린 돈이라 꼭 갚아야 하는 돈이라고 하면서 돈 가지고 나간 사람은 사흘이 지나도록 행방불명이라고 허니 저도 제정신이 아니었지유. 촌각을 다투는 일이라 생각해서 여기저기 소문내고 파출소에 신고하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구먼요. 근디 그 정 씨라는 사람도 친한 친구헌티 도둑맞은 일이었다는 사연은 몰랐지요. 그래서 그랬어유. 더구나 제가 신부님을 험담하거나 걸고넘어지려 했던 마음은 조금도 없었어유. 근디 파출소에서 성당까지 찾아갈 줄이야 저는 상상도 못 했지유. 참 말로 신부님헌티 미안해서 어찌 헌데유. 걱정이에유." 이장은 속이 타는지 말할 때마다 입술에 침을 발랐고 바짝 마른 입술은 서너 발이나 나와 있었다.


"섣부르게 사람을 깎아내리고 판단하는 것은 매우 경솔한 일이었고 또 죄 없는 정 씨를 도둑으로 내몬 일은 결국 좋지 않은 결말로 끝이 났지만, 그때 당시 돈을 잃어버린 김 씨의 입장이나 그런 김 씨의 이야기만 들은 이장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요. 마을 사람들도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이장." 한 영감은 축 처진 이장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그나저나 사건이 잘 풀린 게 천만다행이구만유. 잃어버린 돈도 다시 찾았다지유. 돈을 훔쳐갔다던 그 정 씨 친구라는 사람도 피치 못할 사연이 있었다지유 아마."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정 씨 이야기로는 그 친구도 그럴 사람은 아닌데, 그 돈이 정 씨 돈인 줄 알고 우선 급하게 쓰고 나중에 돌려주려 심산으로 말도 없이 정 씨가 맡아두고 있던 돈에 손을 댄 것이라고 하더라구요. 하지만 나쁜 짓을 한 것은 사실이니 죄를 뉘우치고 있다더군요." 한 영감이 발로 땅에 무언가를 쓰며 말했다.


"휴... 아무튼 이번 일로 마을 사람들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아유." 한숨을 쉬던 이장이 먼 하늘께로 시선을 옮기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게요. 그래도 앞으로 정 씨는 정 씨대로 자기를 믿어주는 사람들을 위해 더 열심히 김 씨 일을 돕기로 했고 김 씨도 함부로 남을 의심하는 습관을 버리겠다고 말하더군요... 처음에는 연초부터 불경스러운 일인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까 오히려 또 다른 깨달음을 얻게 해 준 일이었어요." 한 영감이 발로 쓴 글씨를 다시 지우며 맞장구를 쳤다.


이장과 한 영감의 이야기가 길어지자 영감을 기다리다 지친 마리오는 차에서 내려 나비를 쫒고 있었다. 아직 한기가 가시지 않은 계절인데, 노란 나비가 벌써부터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가며 힘겨운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철 모르는 나비의 호기 어린 날갯짓으로 보이지만 작은 나비의 날갯짓은 봄기운을 깨우기에 충분해 보였다. 나비의 뒤를 쫓는 한 어린 마음에 희망 찬 봄을 선물해주기에는 충분한 작은 울림이 되었다. 마을 사람 모두가 서로 조금씩 양보하며 믿고 의지하기를.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끼리 희망을 잃지 않기를 기도하는 작은 나비는 어린 마리오를 뒤에 남겨두고 힘차게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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