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단지

부활: 가말리엘의 가설

by 진동길

렘브란트 作 ‘엠마오의 저녁식사’.(1648)



# 가말리엘의 가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사도 5,38-39)


교회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사는 인간의 의로움을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완성하시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견지망월(見指忘月)의 愚”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만 눈이 쏠려 정녕 보아야 할 달은 못 본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본질인 달은 보지 못하고(잊어버리고) 중요하지 않은 비본질인 손가락에만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일컫는 말인데요.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육신적인 배고픔과 영적인 굶주림을 모자람 없이 채워 주십니다.

반면 우리의 신앙은 편향되기 쉬워서 자주 조화와 균형감을 잃습니다. 자기중심적인 방향으로 왜곡되고 치우칠 때가 많지요. 견망지월의 어리석음입니다.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신앙과 자기 우물에 갇힌 신앙은 진정한 ‘빵의 의미’를 왜곡합니다. 때문에 기적만 바라거나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으로 치우치기 쉽습니다.


그래서 자주 ‘함께-함’과 ‘함께-나눔’의 영성을 망각하게 되고 어리석게도 하느님을 나만을 위한 존재나 기계적인 존재로 함부로 대하기도 하지요. 마치 자판기처럼 말입니다.


‘빵의 표징’을 ‘빵의 기적’으로 잘못 알아본 군중들이 그렇습니다. 이들은 오병이어 사건의 진정한 의미. 그 표징 속에 감춰진 진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기적. 더 많은 기적을 갈망했습니다. 유아기적 신앙에 멈춰 선 사람들입니다.


오병이어의 표징으로 정작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말씀은 “내 살을 먹고 내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라는 말씀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었지요.(요한 6,55-56.)


그러므로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우리는 ‘함께-함’과 ‘함께-나눔’의 영성을 삶으로 보여주며 살아가야 합니다. 함께 나누고 함께 쪼개어지는 하느님의 몸과 마음처럼.


예수님께서 그랬듯이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참조: 에페 4,1-3.)




‘오병이어의 표징’은 네 복음서(마르 6,30-44; 마태 14,13-21; 루카 9,10-17; 요한 6,1-15). 모두가 소개하고 있는 유일한 표징 이야기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사건인데요.


1. ‘오병이어’의 표징은 예수님의 케리그마에서 뿐만 아니라 구약과 신약을 하나로 엮어주는 사건으로. 구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2.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병이어의 사건은 영성적인 차원에서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삶을 체크해 볼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징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내 신앙’을 체크해 볼 수 있습니다.


3. 또한 ‘오병이어’의 사건은 성체성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과 나’의 관계를 다시ㅡ새롭게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임마누엘 주님은 우리의 육적인 배고픔뿐 아니라, 영적인 굶주림까지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시기에 생명의 주인이시며 그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죄 중에 있을 때에도 그분은 우리를 거룩한 식탁으로 초대해 주시고, 당신의 현존을 보여주시며, 그 사랑의 몸(교회)과 하나 되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기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지치고 힘들어서 기도할 수 없을 때조차 그분은 기도를 멈추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굶주림을 누구보다 더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성사는 인간의 의로움을 성령으로 완성하시데 있지요.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의로움을 당신의 거룩함으로 변화하시고 완성하십니다. 그 시작은 인간이지만 그 완성은 하느님이십니다. 성사의 원천이시며 주체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성사는 인간의 현상학적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8-9)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자들은 ‘그들과 함께 계신 분’이 어떤 분이신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아도 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품고 있는 선한 의지는 아주 미약할 수 있지요. 누룩이 없는 빵 한 조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의 생각처럼.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하지만 그분은 우리 각자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다 한 것으로 만족하십니다. 주님은 더 이상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최선의 것’. '선한 의지'.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다음은 하느님께서 이루시고 완성하십니다. 성사의 신비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초라하기 그지없는 밥상입니다.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의로운 뜻. 그 작은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다음은 성령께서 이루어주십니다.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6,11.) 성사의 은총입니다.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6,13.) 부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차고 넘칩니다. 주님께서 완성하시는 사랑의 성사입니다.


우리는 익히 가말리엘의 가설(예언). 혹은 가말리엘의 원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사도 5,38-39.)




교회의 성사가 거룩한 이유는 인간을 위한 삼위일체의 일(사랑)이기 때문인데요. 그 일. 즉 그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시작되고 이루어지며 마쳐짐으로 완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교회교리 1116-1117항 참조)


그러므로 오병이어의 사건은 삼위일체의 하느님께서 이전에도 하셨던 일과 같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고 완전하게 하신 성체성사의 예표였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과 함께 준비하실 교회의 만찬, 즉 천상 혼인잔치의 예표입니다.(교회교리 1335-1338항 참조)


모든 선하고 의로운 일은 생명의 주인이시고 섭리자이신 하느님께서 완성하시고 마치십니다. 교회의 성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아주 작은 의로움이더라도 하느님께 의탁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몸의 결핍과 정신적 결핍을 청하는 기도는 없어질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할 수 있기를. 그리고 생명의 빵을 서로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생명의 빵은 성령의 불로 완성된 그리스도의 신비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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