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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May 16. 2023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늘 공동체를 위하여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주님은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 알렐루야.(사도 1,11 참조)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저희를 들어 높이셨으니
저희가 거룩한 기쁨에 가득 차 감사의 제사를 바치며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올라가신 하늘나라에
그 지체인 저희의 희망을 두게 하소서.


예수의 승천을 바라보기 위해서 우리는 유한한 지금 나의 모습과 동시에 예수의 신원, 그리고 그분의 부활을 동시에 떠올려야 하는데요. 그러기 위해서 부활의 연장성(延長性, extension)과 비연장성(匪延長性)이라는 말을 꺼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연장과 비연장


많은 종교인들과 철학자들은 임마누엘 칸트가 던진 질문처럼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을 행해야 하고,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과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에 나름대로 응답해 왔습니다. 특히 죽음에 대한 궁극적 질문에는 더욱더 많은 답변들이 있지요. 그리고 그 답변들의 공통점은 인간은 죽더라도 그 죽음을 넘어서 부분적으로나마 살아남는다는 통념과 "나 자신도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으리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있습니다.


한편 양극단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부류는 눈에 보이는 세계, 즉 감각적이고 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세계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에게 죽음 이후의 생명의 삶은 더 이상 의미가 없지요. 죽음은 그것으로 끝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 즉 형이상학적인 세계나 이데아계만이 진실된 세계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지금-여기의 삶'보다 오히려 죽음 이후의 삶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의 세계를 사는 이들의 나라(하느님의 나라)는 '연장의 세계'와 '비연장의 세계', 즉 현상계뿐만 그 너머의 세계인 초월계라고 일컫는 세계가 '지금-여기에' 현존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나라(산 이들의 나라, 생명의 나라)는 이미 '지금-여기'에도 '지금-거기'에도 현존하기 때문이지요. 성자 그리스도가 그 門입니다. 그러므로 성자 예수님을 따르는 양들인 그리스도인들은 감각적이고 이성적으로 접근 가능한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동시에 물리적인 현실과 그 한계를 뛰어넘어 영적이고 초월적인 세상까지 왕래하는 이들입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로마 1,20)


부활의 연장성과 비연장성


"예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어나셨다."(1코린 15,20; 로마 6,4·9; 7,4, 1테살 1,10; 갈라 1,1; 콜로 2,12; 에페 1,20)는 사실은 단원론적인 성서의 인간학(人間學)뿐 아니라, 현대 인간학의 요구에 따라 몸과 영혼이 곧 그 사람(인격) 자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고전 철학의 이원론적인 인간학에서는  육신과 영혼을 따로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여기기도 했지만, 생명의 하느님, 산이들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보여주신 육신의 부활은 '지금-여기'와 마찬가지로 부활에도 우리의 인격적인 연장성을 간과하지 않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통하여 교회는 부활의 연장성과 비연장성을 증언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생리학적인 몸뿐만 아니라 그분의 인격 그대로 (하느님의 생명이신 성령의 능력으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음을(요한 20,19-23; 마태 28,16-20; 마르 16,14-18; 루카 24,36-49) 제자들의 증언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요.(로마 8,11; 1코린 15,45)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부활의 신비를 그분이 직접 보여주셨습니다.(마태 22,30; 마르 12,18-27; 루카 20,27-40) 하지만 닫힌 공간에(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부활하신 그분의 몸은 비연장성도 동시에 갖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몸은 새로운 형태로, 새 차원에서 물질계와 관계를 유지하면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마태 28,20) 바오로 사도도 부활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부활한 '몸의 실재성'과 그 '변화'를 강조하고 있습니다.(1테살 4,13-18; 1코린 15,1-58) 그리고 승천은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에게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합니다.




승천(ascension, ἀνάληψις): 구원을 위한 계시 사건의 완성


성부와 성령과 일치를 이루시는 성자의 수난과 부활 그리고 승천은 그분이 처음부터 하느님과 특수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되새기게 하는데요.(요한 14, 16-17. 20; 1베드 3,18) '하늘'과 '올라가셨다'는 말과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표현들은 예수님의 신원과 하느님의 관계, 그리고 삼위일체 공동체의 일치를 말하고 있습니다.(요한 10,30; 14,10) 즉 한 처음부터 아버지와 함께 한분이셨던 아드님은 본성에 따라 그분은 영원토록 계시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며 '다시-오실-존재'임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다시 오심'은 세 가지 메시지를 되새기게 하는데요. 그 첫째로 승천으로 시작된 '다시-오심'은 하늘나라 공동체에게는 새로운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의 지상사명이었던 구원과 부활사건으로 수렴되고 마침내 궁극적으로 우리도 그분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정체성을 하늘(שָׁמים; οὐρανός)에서 찾고 스스로 하늘로부터 파견된 이들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맏아들 예수의 승천, 곧 예수께서 "죽음에서 벗어나신 동시에 높임을 받으시고 하늘에 올라가셨다"(필립 2,9; 사도 2,33; 5,31; 로마 10,6-9; 에페 4,8-10)는 사실은  그분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는 자기 증언이자 계시의 완성이 되었습니다. 곧 성자의 구원을 위한 자기 계시는 예언사적인 관점에서 수난사건을 통해 이루어져야 했고 그분의 정체성은 다시 부활 사건으로 증명되었으며 승천하심으로 완성된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성부이신 하느님의 성자를 통한 구속 사업의 완전성을 보여 주는 것이며,(히 10,11-22) 이는 성부께서 말씀이신 그분이 만물이 오랫동안 '마라나타'(מרנא תא, Μαραναθα: 주님 오소서)하고 외치던 '마레(주님)' 그분이심을 현현하는 것이었습니다.(에페 1,20-23; 필리 2,9-11) 즉 예수님의 승천은 성부께서 주님을 믿는 이들을 위해 마련하신 맏아들 성자의 자기 현현의 완성이 되었습니다.(히 6,20).


한편 성경에서 예수님의 승천은 입체적으로 증언되고 있는데요. ‘보이는 데서’ 그리고 ‘육신으로’ 승천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사도 1,9-11). 성경이 주지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의 승천이 아무도 모르게 비밀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는 점과 그분의 몸이 부활하셨던 '부활하신 몸 그대로' 였음을 말해주고 있는데요. 그분의 승천이 예언의 성취이자(시 68,17; 110:1) 당신의 가르침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습니다.(루카 9,51; 요 6,62; 14:28; 20:17)




승천: 하늘 공동체의 새로운 파스카(πάσχα, pascha)


예수님의 승천이 전하고 있는 두 번째 메시지는 하늘 공동체가 맞이할 새로운 파스카의 삶입니다. 이는 새로운 '옮아감'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는데요. 주님의 승천이 '지금-여기' 우리에게는 주님의 ‘있지 않음’으로 보여지고 느껴질 수 있지만, 오히려 승천사건은 주님의 부재(不在)가 아니라 유한에서 무한으로 ‘건너감’(파스카 πάσχα, pascha)이며, 하나의 삶에서 모두를 위한 삶으로 ‘옮아감’임을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이 확신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그분의 승천은 지금-여기서부터 하늘나라를 사는 공동체와 이별이나 그분의 사라짐이 아닌 당신과 하늘 공동체와의 관계를 새롭게 한 사건입니다. 주님의 승천은 부활의 완성이자, 확인이었고,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냄이며, 죽음에 대한 승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승천은 우리에게 ‘새로운 파스카’, '새로운 나라', '새로운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제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사도 1,8) 모두를 위한 존재가 되신 것이지요. 주님의 승천은 우리의 승천을 미리 보여준 것이고, 새로운 파스카의 삶. 새로운 나라, 새로운 하늘 공동체를 위한 우리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준 사건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승천으로 아버지의 나라와 세상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승천은 천상과 지상의 항구한 일치와 친교의 표지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승천은 세상을 영원 속으로 인도하는 야곱의 사다리가 되었고, 인류를 하느님의 품으로 받아들이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제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기뻐합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유한을 넘어 무한한 행복의 삶을  선포하는 새로운 파스카의 증인이 되는 삶 말입니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하신 그 말씀대로 사는 삶 말입니다.




하늘 공동체로 파견된 이들의 삶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이 말씀을 들은 이들은 두 가지 삶의 태도로 응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에 하늘만 쳐다보는 삶과 다른 하나는 신뢰하고 인정해 주신 스승의 뜻에 따라 사는 삶 말이지요. 주님의 승천과 ‘다시 오심’ 사이.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시간에 증인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만 쳐다볼 수는 없습니다.


스승이시자 주님의 부활과 승천의 ‘케리그마’(Kerygma, κῆρυγμα)는 유한에서 무한으로 그리고 다시 영원으로 삶입니다. 참 파스카의 삶이자 인류가 진정으로 ‘옮겨가야 하는 삶’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케리그마’도 우리의 삶의 자리도 파스카의 삶으로 옮겨가라고 그분은 다시 용기를 주십니다. 서로 진심어린 친교를 나누고 헌신으로 자신을 내어놓으라고. 육의 갈망과 소유욕을 벗어버리고 승천의 신비 속으로 건너가라고. 주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하늘과 땅이 이미 맞닿아 있다고.


새로운 파스카의 삶은 온전히 내어놓음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벽을 허무는 것부터 시작되어야겠습니다. 세속으로 기울어진 편견과 교만의 옷을 벗어버리고 파스카할 때, 스승이신 분과 함께 아버지께로 올라갈 수 있겠지요. 승천의 삶은 속세의 ‘오름’에서 거꾸로 ‘내려가는 길’이자 ‘자기 낮춤 길’임을 새삼 다시 깨닫습니다.


그것은 내 삶의 지도를 펼쳐보게 하고 내 중심으로 기울어진 나침반을 다시 확인하게 합니다. 그동안 오해와 편견으로 형제들에게 냉랭하게 대했던 것은 아닌지. 무관심으로 일관된 태도를 보였던 것은 아닌지. 용서하기보다 무조건 미워하기부터 했던 것은 아닌지. 거룩함으로 이어진 길은 따뜻함과 배려, 조건 없는 용서와 자비입니다. 이미 내 안에 살아있습니다. 주님은 아직 우리에게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승천할 수 있는 회개의 시간 말이지요. 어제보다 더 작은 자로서 어제보다 좀 더 겸손해지고 어제보다 더 낮아지며,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의 강함을 비우는 종이 되기까지. 우리에게 아직 시간이 좀 더 남아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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