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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May 26. 2023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 걸까

이미지출처: https://raysoda.com/image/264943



버려진 것 같은 삶에게...


“길가에 버려진 넝쿨장미를 주웠다. 말라비틀어진 줄기를 조심스레 옮겨 심고 말을 걸었다. ‘가엽은 것... 얼마나 아프니?’ 그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조금씩 살아난 장미가 어느 날 환하게 웃었다.”


“식물을 독특하게 길러내고자 할 때면 나는 무릎을 꿇고 그 식물에게 말을 건넨다.”


미국의 유명한 식물학자이며 전 세계에 수백 종의 개량 품종을 선사한 '장미 속의 성자' 또는 '식물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루터 버뱅크(Luther Burbank)의 말이다.


그의 저서 [방법과 발견]에는 가시 없는 선인장을 개량할 때 일기를 이렇게 쓰고 있다.


"가시 없는 선인장을 만들어 내기 위한 실험을 수행하는 동안 나는 <사랑의 진동>을 창조해 내기 위해 그 식물들에게 이따금씩 말을 걸곤 했다. '너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어. 그러니 방어를 위한 가시도 필요 없는 거야. 내가 너를 지켜주면 되잖니?'


그랬더니 그 사막의 식물은 점차로 가시가 없는 변종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나는 이 기적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그리하여 점차 과학적인 지식과는 별도로 식물 생장의 비밀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이 두려운 이들에게...


"우리의 마음속엔 저마다 지워지지 않는 한 아이가 살고 있다.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자라고 싶지 않은 아이. 아이는 네버랜드로 날아가 버린 피터 팬처럼 우리의 마음속 한구석에 자리 잡은 섬 안에서 살고 있다"


"그 아이의 불안을 잠재우는 길은 성장을 멈추어 버린 그 아이에게 다시금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사랑은 바로 그 아이를 성장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린아이 같이 말하고, 아이처럼 유치한 장난을 치면서 깔깔거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지…….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닭살’이라며 눈살을 찌푸리지만 그게 바로 과거 어느 언저리에선가 성장이 멈추어 버린 아이를 성장시키는 과정이다. -김혜남,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 걸까) 중에서-




‘율법’(תּוֹרָה)은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생명의 법’(spirit, Ψυχή)이자 인간을 위한 ‘사랑’(soul, πνεύμα)이었습니다. 율법 조항 속에 하느님의 뜻이 스며들어있었고, 하느님의 사랑이 그분의 가르침 속에 한 자 한 자 속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예언서 역시 위대한 예언자들의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계약의 백성들에게 삶의 지침이자 활력이었고 영적인 안내서이자 규범이 되었습니다.(로마 7,14) 한마디로 ‘율법’(תּוֹרָה)은 하느님의 ‘생명의 법’(spirit, Ψυχή)이자 인간을 위한 ‘사랑’(soul, πνεύμα)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의 율법은 이런 근본정신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구속하는 장치로 전락하여, 왜곡 적용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하느님 말씀이 생명을 잃었고 인간에 대한 사랑을 저버린 것이었습니다. 본질을 잃고 형식만 남은 것이지요. 그것도 사람을 구속하기 위한 형틀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너무 쉽게 남발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말을 다시 되짚어봅니다. 사랑이라는 말의 본래 주인은 '사랑'이신 하느님이신데, 내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내가 중심이 된, 내 마음대로 내 방식의 사랑은 아닐까? 아니라면 정말 ‘너’를 위한 '주님'의 사랑일까?


아무 때나 마음 없이 뱉어내는 사랑이라는 말. 마음의 온도 없이 너무 자주 사용한 탓에 혼란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사랑이라는 말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필로스 사랑'과 '아가페 사랑'이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아버지 곁으로 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ἀγαπᾷς με)?’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φιλῶ σε)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ἀγαπᾷς με)?’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φιλῶ σε)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φιλεῖς με)?’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φιλῶ σε)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 15-17)



온도가 다른 두 사랑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ἀγάπη)과 베드로 사도가 응답하고 있는 ‘사랑’(φίλος)은 서로 다른 ‘사랑’이었습니다. 마음의 온도도 달랐고 그 깊이도 색깔도 다른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성령을 통한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루카 7,47; 로마 5,5.8)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루는 사랑”(로마 8,28)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누누이 말씀하셨던 아버지의 사랑(5,29-30)이자 이웃에게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랑(마태 22,39)이며, 원수까지 용서하고 품어주는 사랑(마태 5,43-44)입니다. 반면 베드로가 응답하고 있는 사랑은 ‘필레오(φιλέω)’ 사랑입니다. 친구 간의 사랑이자 관념적이며 정신적인 사랑이지요.


예수님은 두 번씩이나 아가페 사랑을 물어보셨습니다. 당신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주시고 가르치신 사랑을 베드로에게 원하시지만, 베드로는 고집스럽게도 마지막까지 주님의 사랑을 모른 척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사랑이 아닌 신의 사랑, 곧 하느님의 사랑으로 율법의 본래 의미를 되살리시고자 하십니다. 사랑이 빠진 형식적인 법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려고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그 뼈들 사이로 두루 돌아다니게 하셨다. 그 넓은 계곡 바닥에는 뼈가 대단히 많았는데, 그것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내가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주 하느님이 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에제 37, 2-3.5)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7-18)


완성한다는 것은 부족함을 완전하게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사랑의 영으로, 사랑의 숨으로,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정신을 완전하게 하시고 숨을 불어넣어 생명으로 되살리려 하십니다. 마른 뼈에 생명의 숨인 사랑을 불어넣어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참조 로마 13,10)


예수님의 모습은 율법의 본래의 정신을 되살리려는 사랑의 투쟁이었습니다. 목숨을 바치시기까지 율법을 완성하시려는 처절한 창조주의 몸부림이었습니다. 그것은 모두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기 위한 아버지의 뜻과 의지에 순명하는 길이었습니다.(요한 6,40) 원수를 사랑하는 길이었고(마태 5,43-48),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었으며(마태 7,12), 가장 큰 계명(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되살리는(마태 22,37-40) 길이었습니다.


마른 뼈들을 살리고 앙상했던 가지에 푸른 잎과 꽃을 피울 수 있는 주님의 영(사랑)입니다. 사랑의 영은 율법을 완성하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주었습니다. 입만이 아닌 온몸으로 그리스도 사랑을 증언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생명이신 분과 함께 사는 것임을. 그것이 율법에 숨을 불어넣는 것이고 율법을 완성하는 길임을 되새겨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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