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관자 효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말씀의 비유와 그것이 오늘날 우리 삶에 던져주는 도전을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바로 루카 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율법 교사의 물음에 답하시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핵심을 상기시키십니다. 그리고 이웃이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에, 강도를 만나 쓰러진 사람과 그를 지나친 사제와 레위인, 그리고 그를 도운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당시 사제와 레위인이 피해간 이유는 율법의 정결 규정 때문이었습니다. 죽음이나 피를 만지면 부정해져 성전 봉사를 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율법적 의로움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눈앞의 고통을 외면했습니다. 하지만 유다인과 원수로 여겨지던 사마리아인은 멈춰 섰습니다.
그는 율법보다 자비를 택했고, 사랑의 손길로 상처받은 이를 돌보았습니다. 이 장면은 율법의 참된 완성은 자비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 비유는 오늘날까지도 ‘착한 사마리아인 법(Good Samaritan Law)’의 상징적 토대가 되어 왔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 법은 위급 상황에서 다른 이를 돕다가 생길 수 있는 불가피한 실수나 손해에 대해 돕는 이를 보호합니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 현장에서 응급조치를 한 사람이 나중에 법적 문제로 고소당하지 않도록, 착한 의도로 도움을 준 자를 법적으로 보호한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독일, 캐나다 같은 나라에서는 ‘구호의무법(Duty to Rescue)’으로 발전되어, 도움을 주지 않고 방관할 경우 오히려 처벌받는 제도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는 개인의 책임을 넘어 공동체적 윤리와 연대의 가치를 법으로까지 명문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합니까?
심리학은 이와 반대되는 현상을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라 부릅니다.
1964년 3월, 미국 뉴욕 퀸즈의 한 아파트 인근에서 일어난 ‘키티 제노비스 사건’은 이 현상의 상징적 사례로 알려져 있습니다.
28세의 젊은 여성이 새벽에 귀가하다가 흉기를 든 괴한에게 습격을 받았고, 그녀의 비명과 도움 요청을 인근 주민 약 38명이 들었지만, 즉시 경찰에 신고하거나 달려가 돕지 않았다고 보도되었습니다. 그녀는 결국 두 차례 공격을 받고 과다출혈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있었음에도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는 사실은 ‘누군가는 하겠지’라는 책임 분산과, ‘괜히 나서면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우리 안에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심리학자들이 방관자 효과라는 개념을 연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인간의 무관심과 도덕적 회피의 맹점을 일깨워 줍니다.
신학적으로도 죄 없는 방관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에게 마지막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자비는 선택이 아니라, 제자된 삶의 필수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착한 사마리아인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율법적 의로움에 갇혀 이웃의 고통을 지나치는 사람,
방관자 효과에 묶여 침묵하는 사람, 그 모습은 바로 오늘날의 사제와 레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법적 의무를 넘어 내적 양심과 신앙의 소명으로 누군가 쓰러져 있는 길가에 주저 없이 무릎을 꿇어 손을 내미는 삶을 요청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오늘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 법의 의미와 키티 제노비스 사건의 교훈을 함께 되새깁니다.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방관자 효과는 우리의 마음을 은밀히 무디게 만듭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 무디어진 마음을 깨우는 불꽃입니다.
오늘 우리의 골목과 길 위에서,
우리도 작은 사마리아인이 되어
누군가의 상처를 향해 한 발 더 다가서길 바랍니다.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이 말씀이 우리의 삶에 살아 움직이며,
더 큰 자비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