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맥주는 350ml만 마시기로 작정한 사람
장면 1.
Y는 편의점에 앉아있다.
카스라이트(카스에서 설탕을 뺀 버전)를 마실 바에 시원하게 카스를 마시자고, 설득하던 스스로에게 패한 뒤 카스라이트를 손에 쥐고 삐빅- 계산까지 마친 뒤였다.
문을 밀고 편의점 밖을 나오니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젖어있는 보라색 플라스틱 의자를 스윽스윽 닦아 내고 털석, 앉았다. 누가 발명했는지 모를 은빛 캔따개에 감탄하며 두 번째 손가락으로 유려하게 딸깍.
치- 하는 탄산 폭발음이 작게 울렸다.
장면 2.
Y는 횡단보도 위 사람들을 구경한다.
두 손을 모아 가까스로 정수리를 가리고 와다닥 달려가는 누구를, 와학학 목이 뒤집어져라 웃음 지으며 지나가는 떠들썩한 무리를, 거하게 취한 노년의 두 남자들을, 그리고 그 그 곁을 무심히 지나가는 검은 모자를 쓴 사람을.
혹자는 Y를 구경했다. 안주도 없이 맥주 한 캔을 들이켜는 여자를. 오른쪽 귀 왼쪽 귀 우왕좌왕인 날파리 떼들을 차마 담지 못해, 비어있는 두 동공을.
하얀 캔버스 백팩을 뒤로 맨 젊은 여자가 동행에게 속삭인다.
‘야 저 여자, 혼자 막 중얼거려..’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 그녀의 동행이 대꾸한다.
‘미친 건 아니겠지?‘
장면 3.
Y는 노래한다.
‘비가 내리고- 음 악이 흐르면- 난 당시-늘 생각케-요’
4도씨의 알코올 몇 입에도 적당히 취할 줄 아는 자신의 몸을 기특해하면서. 자신의 앞에 있는 저 여자들은 관람객이 아니란 사실을 이미 알면서. 꿎꿎하게 노래를 이어 나간다.
취기를 노래로 풀었던 그의 아버지,
춤으로 풀었던 그의 할아버지,
그리고 갖은 타령으로 풀었던 그의 모든 조상들이 마치 그녀의 머리 위를 맴도는 듯, 그녀는 움직임을 곁들인 노래, 같기도 한 어떤 선율, 을 읊조렸다.
그 일은 카스라이트 500ml를 반캔정도 마시고 벌어진 일이었다.
장면 4.
Y는 올라간 입꼬리를 하고선, 물 웅덩이로 떨어지는 선명한 빗방울의 흔적을 바라보고 있다.
‘야 저 여자 막 차도로 뛰어들고 그러는 거 아니겠지?’
조금 더 발랄한 톤의 목소리를 한 여자가 묻는다.
‘야 야! 돌아보지 마!! 우리가 자기 얘기하는 줄 알면 어떻게!!’
그러니까 지금.
Y와 두 여자는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
두 여자가 길을 건너기 위해 기다리는 횡단보도 그 바로 뒤에, Y가 카스라이트를 마시는 편의점이 있는 것이다.
Y는 생각한다.
‘어째서 저 여자들은 저리도 큰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비밀스럽게 나누는 것인가. 사실은 거의 셋이 대화를 해도 무리 없는 이 거리감을 그들은 모르는 것인가’
그러다 문득 Y는 두 여자가 고맙다. 힐끗거리며 다음 블록을 향해 걷는 저들은, 어쩌면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아무와도 이야기하지 않은 오늘이 완성되는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삶에 잠시 행인 134 괄호 열고 편의점녀 괄호 닫고 가 된, 그런 기분.
<조금 전 Y가 핸드폰을 켜고 메모장에 적은 문장>
연탄재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군가에게 행인 134가 되어본 적이 있나.
장면 5.
뿌듯하게 웃던
Y는
영차 하며 일어나,
어딘가로 향한다.
XX노래방이라는 간판이 크게 걸린 곳이다.
Y의 인생은 오늘도 꽤나 본격적이다.
그리고 그건.
카스라이트 500ml 다 비운 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