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다. 춥다. 속았다.
이름이 이주성이라고 했다.
그나마 박 씨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춘자는 미영이가 그동안 직장 생활하며 번 돈으로 월세방을 얻어 나간다는 말에 독립, 동거를 허락했다. 임신까지 했는데 춘자가 반대한다고 순순히 말을 들을 연놈들이 아니었다.
가까운 주택단지에 월세가 저렴한 방을 찾았다고 했다. 방 하나에 화장실, 작은 주방이 있다는 반 지하 방을 얻어서 살림을 차렸다. 둘이 깨를 볶던, 참기름을 짜던 내 알 바가 아니다.
이서방과 친하게 지내던 동네 형이 추어탕 식당을 하는데 급한 사정이 있어서 식당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했다. 단골손님이 꽤 많아서 아깝다고 하며 그 식당을 인수하는 것이 어떠냐고 이서방과 둘째 딸 미영이를 꼬드겼나 보다.
이서방이 음식솜씨가 좋아서 식당을 하면 좋을 것 같아, 하면서 한 달 정도 추어탕 만드는 법을 배우러 다니더니 식당을 인수하기로 했다고 했다. 자신 있다면서.
월세방의 보증금을 빼서 식당 인수하는 데 보태야 하니 춘자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들어오겠다고 하는데 춘자는 어이가 없었다.
돈을 많이 준다는 말에 ‘그래 한번 언제까지 가나 두고 보자’는 생각으로 이전에 미영이가 사용하던 방을 내주었다. 둘째 딸의 두 번째 남자, 이서방과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서방의 처가살이도 시작되었다.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안 한다는.
불러오는 배를 안고 식당의 잡일을 하는 미영이 꼴이 보기 싫어 춘자는 식당이 잘되는지 어쩐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서방은 너무나도 정직하고 쓸데없이 인심이 후해서 장사가 잘 돼도 남는 게 없다며 집에 오면 미영이의 푸념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나쁜 말만 하면 뱃속에 아기가 엄마가 하던 불평불만을 듣고 성격이 나쁜 아이가 태어나니 그만하라고 이서방이 소리친다.
항상 그렇듯이 이렇게 말싸움이 시작되면 남편이 누워있는 방문을 꼭 닫고 춘자는 묵주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둘째 딸의 딸이 태어났다.
뭘 어떻게 얼만큼 먹었길래 갓난아이가 4.2킬로그램인 우량아가 나왔다.
갓난아이를 엄마한테 키워달라고 하면 절대 안 된다는 다짐을 받고 춘자와의 동거를 허락했기에 미영이는 아기를 봐주는 도우미 아주머니를 고용했다.
식당이 아무리 잘되면 뭐 하나.
개 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기 전에 다~ 남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걸…
큰 딸의 딸 수진이는 뭘 줘도 안 먹어서 말린 멸치처럼 말랐는데, 둘째 딸의 딸 지민이는 잘 먹는다. 너무 잘 먹여서 이 아이는 앉혀놓으면 저절로 굴러갈 정도로 동그랗다.
너무 먹이면 짜구난다며 춘자가 말리면 이 아이는 알아듣는 것 마냥, 꼭 뿔난 복어 같이 춘자를 쳐다본다.
그만 먹여도 될 텐데, 하면서 춘자는 돌아서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식당에 손님이 줄어서 큰일이라고 한숨에 땅이 꺼질 정도로 걱정이 늘어졌다. 식구가 늘었으니 더 벌어도 시원찮을 텐데 적자라니.
내 새끼 클 때는 몰랐는데 손녀딸 크는 걸 보니 무섭기까지 하다. 요즘 애들 교육비는 춘자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많이 든다고 하니.
가난한 엄마 둘째 딸 미영이.
일하는 엄마를 위해 어린아이를 돌봐주며 교육까지 해준다는 유아원에 보낼 돈이 없다고,
간단한 교육용 놀이 지도사 자격증을 따서 자기가 직접 가르치겠다고 온갖 궁상을 떨고 있을 때 호주에 있는 큰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궁상맞은 둘째 딸 가족과 같이 살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손녀딸 핑계를 대고 지긋지긋한 남편의 병치레를 둘째 딸에게 맡겨도 누가 뭐라 안 할 것이다.
텔레비전에서만 보았던 그 아름다운 나라 호주에서 살게 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공항에서 마중 나올 큰 딸을 찾아 헤매면서 춘자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춘자와는 다르게 생긴 백인과 흑인,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뭔가를 물어보는 공항 직원, 뭉그적거리는 춘자에게 거인 같은 흑인 남자가 눈을 크게 뜨고 분홍색 혀를 두루며 뭐라고 떠든다.
분명히 비행기를 타기 전에는 화창한 봄날이었는데 여기 호주라는 곳을 와보니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목덜미에 와닿아 그 썰렁한 기운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공항 출구를 빠져나오니 춘자가 입은 코트가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 탓에 풍선처럼 부풀어 오면서 차가운 한기가 옷 속으로 휘몰아 들이닥쳤다.
춘자는 손을 흔들며 엄마를 큰 목소리로 부르는 큰 딸의 얼굴을 찾아냈지만, 긴장감과 추위 탓인가, 네모진 얼굴 근육이 딱딱한 빨랫비누마냥 굳어버려 입술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큰딸 미정이의 빨간 립스틱을 바른 얇은 미소를 보며 춘자는 화들짝,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