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이는 분리불안이 심했다. 3살 무렵 함께 살기 시작한 후 1~2년 사이에 그의 분리불안이 절정에 달했던 것 같다.
처음엔 장난감을 부수어 놓는 귀여운 수준이었다.
"하하! 우리 장군이 엄마가 보고 싶어쪙~~ 알게쪙~~ 오구오구."
하지만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첫눈에 반해 산 연한 분홍빛 에나멜 샌들은 "내일 신어야지~" 했으나 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소파는 구멍이 뚫려 너덜너덜해졌고, 어떻게 끌고 왔는지 중문을 열자 '여기 앉아~' 하듯 내 쪽을 향해 있었다. 단단했던 중문의 밑부분은 갈기갈기 찢겨 나갔고, 심지어 콘크리트 벽이 긁히고 뜯겨 나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정도가 되니 '오구오구'는 당연히 나오지 않았다. 수백만 원의 수리비는 예사롭지 않았다.
가슴으로 뜨겁게 만나 돈으로 무럭무럭 자라는 우리 장군이.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결국 장군이가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웃 주민께서 집 밖에서 장군이를 발견하고 일하고 있던 나에게 연락을 주셨다.
"개가 나왔어요, 개가!"
첫째, 야무지게 긁어 뜯어놓은 중문 밑부분에 코를 갖다 대고 옆으로 밀어 문을 연다.
둘째, 코어에 힘을 주고 뒷다리로 일어서서 현관문에 앞발 두 개를 착 갖다 댄다.
셋째, 앞발로 도어록 손잡이를 잡아 밑으로 내리면서 동시에 코어에 힘을 한 번 더 주어 현관문을 앞으로 밀어버린다.
장군이가 혼자서 문 밖으로 나가려고 펼쳤을 시나리오가 내 눈앞에 선명히 그려졌다.
일하다 급히 집에 오는 일이 한 번, 두 번, 늘어났다. 이웃 주민께 죄송한 마음도 커져갔다. 연락을 받고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가도 시간이 걸렸지만, 다행히 겁 많은 장군이는 위층이나 아래층 계단에서 멀리 가지 않았다.
"장군~!!!!!!!!"(아이고, 이 놈아, 여기 있었어! 이렇게 나오면 어떡해, 뭐가 그렇게 불안했어?! 아이고, 이 놈 시키~~~~~~~!!!)하고 내가 부르면, 장군이는 긴장했던 눈빛을 순식간에 풀고 애틋한 갈색 눈으로 나에게 달려왔다. 내 몸에 머리를 파묻고 발을 굴렀다. 더 가까워질 수 없을 만큼 붙어있으면서도 계속해서 발을 굴리며 머리를 내 몸에 비벼댔다.
남편과 나는 장군이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엄마가,
아빠가,
나가도,
꼭 돌아온다는 약속을, 장군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수년간 정성을 다했다.
반려견의 분리불안 완화에 도움이 되는 자료를 찾아 꾸준히 실천했다. "갔다 올게"라는 말을 할 때도 신경 썼다. 들뜬 목소리로 "갔다 올게~~"라고 하지 않고, 슬프게 "갔다 올게…"라고 하지도 않았다. 담담하게, 평소 장군이에게 말하듯 "갔다 올게"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갔다 올게" 톤을 찾은 후에는 끊임없이 반복하는 일만 남았다.
지치지 않고 반복하며,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엄마가 지금 나가지만 널 떠나지 않고, 어디 가서 죽지 않고, 다시 너한테 돌아올 거야"라는 마음이 장군이에게 전달되기를 바랐다.
간절함을 담아 끊임없이 반복했던 "갔다 올게".
장군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도 병행했다.
장군이는 불안에 휩싸여 어쩔 줄 모르던 모습에서 벗어나, 그 불안의 불씨를 잠재우고 우리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서서히… 서서히… 서서히….
반복에 반복을 거친 시간은 해를 넘기고 또 다음 해를 넘겼다. 그렇게 간절함을 담은 "갔다 올게"는 장군이와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몇 년에 걸쳐 만든, 깨지지 않는 무조건적인 약속이 되었다. 앞으로 장군이가 불안해하지 않고 함께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이후 장군이는 놀랄 만큼 편안해졌다. 남편과 나도 안심하고 외출할 수 있게 되었다. 홈캠으로 확인해도 장군이는 대부분 평온해 보였고, 집 안 파손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내가 돌아오면 묵직한 몸으로 날렵하게 다가와 큰 머리를 파묻는 모습만은 변함없었다.
우리는 장군이의 분리불안이 크게 개선되었음에도 방심하지 않았다. 외출할 때마다 빠짐없이 "갔다 올게"라고 말했다.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오랜 시간 집을 비우는 일도 삼갔다. 신혼여행을 마지막으로수 년간 해외여행은 내가 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었고, 국내여행은 장군이와 누룽지를 데리고 갈 수 있는 곳만이 우리의 여행지였다. '널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고, 우리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는 "갔다 올게" 약속을 절대 깨고 싶지 않았다.
장군이가 혈관육종 진단을 받고 입원할 때였다. 입원을 위해 병원 선생님과 함께 들어가야 하는 장군이는 육중한 몸으로 저항했다. 입원실로 가는 문을 지나가지 않으려고 버텼다. 나는 차오르는 호흡과 눈물을 누르고 장군이에게 "갔다 올게"라고 말했다. 최대한 평소 모드로 말했지만, 평상시와 조금이라도 다른 점을 기가 막히게 눈치채는 장군이에게 그땐 분명 들켰을 것이다.
이후부터는 들키지 않으려 쥐어짜듯 애를 썼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똑같이 행동했다. 울다가도 장군이를 만나면 마치 옆 방에 있다가 장군이가 있는 공간에 들어온 것처럼 '평소처럼' 행동했고, 헤어질 때는 평범한 외출인 듯 "갔다 올게"라고 말했다. 눈물을 쏟아내는 것은 입원실을 완벽하게 나온 후였다.
일주일의 입원 기간 동안 우리에겐 하루 두 번의 면회 시간이 허락되었다. 병원 규칙은 하루 한 번 면회였지만, 장군이의 강건한 고집 덕분에 예외가 만들어졌다. 병원 선생님과 산책을 나갔지만 배변은 커녕 소변을 한 방울도 보지 않는다는 연락이 왔고, 엄마 아빠가 아니면 절대 실외 배변을 하지 않는 장군이를 위해 병원 측에서 배려해 주셨다. 이처럼 장군이는 미련하리만큼 고집스러웠다. 자신의 기준이 충족되지 않으면 절.대.로. 마음을 열지 않는 아이였다.
입원 기간에도 변함없이 우리와 장군이 사이의 "갔다 올게"는 절대 깨지지 않는 약속의 말이었다. 낯선 곳에서 아픔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있을 장군이에게 "큰 일 아니야, 곧 엄마 아빠랑 다시 집에 갈 거야. 장군아, 괜찮아"라는 마음이 닿기를 바라며 그렇게 "갔다 올게"를 말했다.
"갔다 올게"는 나에게 유난히 특별한 말이다.
장군이와 만든 굳건한 약속의 말.
내 간절함을 장군이가 받아들인 말.
눈물을 삼키고 장군이를 달랜 말.
정말 고집스러웠던 우리 장군이 전용 맞춤 말…
장군이가 세상을 떠날 때, 나는 수없이 말했다.
"갔다 올게. 갔다 올게. 엄마 갔다 올게. 장군, 엄마 갔다 올게."
“장군아, 사랑하는 우리 장군. 엄마 갔다 올게. 우리 꼭 다시 만날 거야. 네가 그토록 좋아하던 겨울에 만나자. 갔다 올게, 장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