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위관을 잘라버렸다.
병원 대기실에서, 어떤 보호자가 아이를 데리고 외래 진료를 마치고 "~~ 야, 집에 가자"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나도 우리 장군이 데리고 집에 가고 싶어’라며 울음을 터뜨린 적이 있다. 심장에서 새롭게 발견된 혈전 때문에 장군이가 수술을 하더라도, 수술 중 사망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후였기 때문에 그랬나 보다.
완치가 아닌 완화가 목표였지만,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드디어 장군이를 데리고 집에 가는 날이 되었다. 퇴원 후 집에 들어오니 장군이의 모습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살이 쏙 빠져 예전의 통통했던 몸체가 여위어졌고, 한눈에 봐도 활력이 넘치던 모습은 사라졌다. 이제는 걸음 하나하나에 힘이 들어 보였으며, 현관문을 지나 여러 켤레 놓인 신발들을 피해 가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신발들 사이를 지나가지 못해 내가 얼른 신발들을 양쪽으로 갈라놓아 치워 놓자, 걸음 하나하나 힘겹게 걸어가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장군이는 병원에서부터 비위관(코를 통해 위까지 넣는 고무 튜브, 구강 섭취가 어려울 때 위에 유동식 공급을 위해 사용)을 거치한 채로 집에 왔다. 비위관과 복부 수술 부위를 보호하기 위해 넥카라도 착용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장군이는 자신의 공간인 대형 쿠션으로 가 똬리를 틀고 누웠다. 동그란 갈색 눈을 깜빡이며 집에 돌아와 안심한 듯 보였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장군이가 약해지고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하는 모습이 안쓰럽고 어색했다. 수술한 부위가 아플 텐데도 장군이는 지친 할아버지처럼 그대로 슥 잠들어 버렸다. 나는 장군이를 예뻐하고 귀여워할 새도 없이, 이제 돌보는 역할이 주어졌음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장군이는 한참 뒤에야 일어났다. 누룽지의 정신없는 환영 인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장군이의 밥이 변했다. 사료를 밥그릇에 담기만 해도 고개를 쳐들고 주둥이를 모아 ‘오오오오-!’를 외치며 반기던 장군이에게 이제는 콧구멍부터 위까지 연결된 튜브에 유동식을 아주 천천히 급여해야 한다. 장군이는 유동식에 하나도 기뻐하지 않았다.
새벽에 문제가 발생했다. 비위관 튜브에 주사기를 연결해 유동식을 천천히 넣는 도중, 장군이가 불편했는지 갑자기 유동식을 토하고 비위관이 입으로 나와버렸다. 나는 즉시 유동식이 기도로 넘어가지 않도록 장군이의 자세를 살펴야 한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 사이 장군이는 입으로 나온 비위관을 이빨로 잘라 버렸다. 나는 재빨리 입에 걸려 있는 튜브를 잡아 빼 장군이가 삼키지 않도록 했다. 장군이가 머리를 빠르게 흔들자, 콧구멍에 꽂혀 있던 비위관마저 빠져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과 내 옷, 그리고 장군이의 얼굴까지 유동식 범벅이 된 상황에서 나는 장군이의 상태를 살폈다. 장군이는 머리를 털어 비위관을 자신에게서 없애 버리고 나니 내심 좋아하는 듯 보였고, 갈색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다행히 기침이나 호흡 곤란 같은 증상은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두 조각의 비위관을 주워 연결해 보았다. 센티미터로 표시된 길이가 일치하는지, 잘린 양쪽 끝이 정확히 맞는지 확인했다. 혹시라도 튜브 조각이 장군이 체내에 남아있을 위험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잘린 모양이 일치하는 것 같았지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병원 응급실에 전화해 상황을 설명했다.
결국 우리는 장군이의 체내에 비위관 조각이 남아있지 않은지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엑스레이를 찍기로 했다. 남편과 나, 그리고 장군이는 새벽에 우리가 낮에 떠나왔던 그곳, 병원 응급실로 다시 향했다.
장군이의 갑작스러운 진단과 수술, 그리고 시한부 선고까지— 당황스러움, 걱정, 막막함, 답답함 등의 감정과 두통, 식욕부진, 소화불량 같은 신체적 증상으로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해 피곤에 절은 남편과 내가 불쌍했다. 그리고, 퇴원한 지 몇 시간 만에 싫어하는 병원에 다시 가야 하는 장군이가 안쓰러웠다. 다행히 비위관이 몸속에 남아있지 않음을 확인했고, 다시 비위관을 거치하는 대신 구강 섭취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종양이 여러 장기에 전이된 상태와 복부 수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고려해, 부드러운 음식을 조금씩 자주 주는 데 신경 써야 했다.
장군이를 데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어느덧 새벽 3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집에서 혼자 기다릴 누룽지도 걱정되었다. 앞으로의 장군이 간병 생활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 그래도 힘을 내자는 다짐,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1개월 일지 3개월 일지 모른다는 불안함, 장군이의 눈빛, 남편과 나의 피곤함이 뒤섞인 채로 새벽을 달려 집으로 향했다.
견주로서 다양한 역할이 있지만, 돌이켜보면 장군이의 퇴원 후부터는 "습성과 언어가 다른 동물"에게 전적인 돌봄을 제공해야 하는 역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반려견이 노견이 되거나 갑작스럽게 큰 병을 진단받는 순간부터는 더 이상 "귀여운 강아지"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미리 인지하는 것이 좋다. 순식간에 "예민하게 살피고 살뜰히 보살펴야" 하는 반려견의 변화된 상태를 받아들이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반려견에게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장군이가 예전처럼 걷지 못하거나 소변을 볼 때 한쪽 다리를 들지 못하면, 그 자리에 멈춰 멍하니 서 있곤 했다. 장군이도 자신의 변화된 몸 상태를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나는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각자가, 그리고 서로가 변화된 상황에 적응해 가는 과정에서 반려견은 이제 온전히 나의 도움이 절실한 존재가 되었다. 이 현실을 잘 받아들이고,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들이 남은 시간을 더욱 의미 있고 행복하게 보내길 바란다.